4. 통치에서 경영으로
“정주영 후보의 사생활을 폭로하세요”
1992년 12월, 제14대 대선이 있었다. 당시 대선은 민자당 김영삼 후보, 민주당 김대중 후보 그리고 국민당 정주영 후보의 3강 구도로 치러졌다. 국민의 관심은 정주영 후보의 국민당 돌풍에 집중되고 있었다.
정주영 후보가 여당 표를 더 많이 잠식할 것이란 우려 때문에 당시 민자당은 크게 긴장하고 있었다. 선거 판세를 지켜보던 차에 염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민자당 선거대책본부 홍보 팀에서 TV 찬조연설을 제안해왔다. 정주영 후보의 개인적 결함이나 사생활을 비판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의원, 정주영 후보의 사생활과 비리를 잘 알죠? 그걸 폭로해 주세요.”
바로 1년 전까지 정주영 후보와 함께 기업 활동을 했던 나로서는 홍보 팀의 그 같은 요구에 응할 수 없었다. 단순히 의리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기업인 시절 세계 곳곳을 누비며 선진국의 정치를 목격했다. 선진화된 정치를 실현시키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정치권에 입문했다. 그런 내가 네거티브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홍보 팀의 요구와 달리 정 후보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방향으로 연설문을 작성했다. 왜 재벌 총수가 정치를 하면 안 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정 후보가 평소에 “김영삼 씨는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이다”고 말한 사실을 공개하며 김영삼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연설문을 선거대책본부에 제출하자 민자당이 발칵 뒤집혔다.
“이 의원이 정주영 씨를 이렇게 높이 평가하다니!”
“이건 김영삼 선거운동 연설문이 아니라 정주영 선거운동 연설문이군!”
결국 이 사실이 김영삼 후보의 귀에 들어가 내 찬조 연설은 무산됐다. 우여곡절 끝에 김영삼 후보는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이 사건 이후 여당 측 인사들은 나를 곱게 보지 않았다. 이 일은 3년 후까지 내게 영향을 미쳤다.
서울시장 경선으로 YS와 충돌하다
1995년 6월,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자당은 후보 경선 방침을 발표했다. 나는 서울시장 후보로 경선에 단독 출마했다. 당시 청와대 실무자들도 내 출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인지도와 신뢰도에서 폭발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김영삼 대통령은 소속 의원들과의 비공식 만찬 자리에서 서울시장 선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장 후보 경선을 취소하고 정원식 전 총리를 추대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기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대통령의 방침이 정해지자 당 대표는 나를 불러 말했다.
“이 의원, 대통령의 결정이니 서울시장 경선 후보를 사퇴하시오.”
나는 당에서 경선을 하겠다고 발표해놓고, 대통령 말 한마디에 이제 와서 경선을 취소하는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사퇴 권유에 정면으로 반발했다.
“당무회의를 열어 경선을 취소하고 그 사실을 국민에게 발표하세요. 그럼 깨끗이 물러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물러날 수 없습니다.”
“이 의원 한 사람 사퇴하면 끝나는데 왜 일을 복잡하게 만듭니까?”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청와대에서 나섰다. 이원종 정무수석이 나를 불러 대통령을 만나라고 설득했다. 결국 내 의견을 충분히 피력할 기회를 준다는 약속을 받고 김영삼 대통령을 만나기로 했다.
1995년 5월 2일, 나는 김 대통령을 만났다. 30분으로 예정된 조찬은 두 시간 이상 계속됐다. 김 대통령은 대선 때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준 정원식 전 총리에게 신세를 갚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민주화를 위한 김 대통령의 헌신에 존경심을 표하면서 민주적 절차와 원칙을 강조했다. 김 대통령은 나를 여러모로 설득하려 했다.
“이 의원은 앞으로 다른 일을 할 기회가 많지 않습니까?”
사퇴 조건으로 다른 자리를 주겠다는 뜻이었다.
“제가 후보를 사퇴하고 다른 역할을 맡게 된다면 남들이 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저는 지금까지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대통령님 임기 중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는 김영삼 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김 대통령도 내 원칙을 꺾지는 못했다. 결국 민자당은 서울시장 후보경선을 수용했다. 1995년 5월 12일,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7,700명의 대의원이 모인 가운데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이 치러졌다. 역대 처음이자 최대 규모의 경선이었다.
그러나 경선이 공정하게 치러질 리 없었다. 나는 송파구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대의원들은 만나보지도 못한 채 경선을 치렀다. 내가 연설을 할 때마다 마이크에 문제가 생겼다. 투표도 지구당 위원장 책임 하에 각본대로 이루어졌다. 결국 나는 2,884표(37.4퍼센트)를 얻어 4,701표(61퍼센트)를 득표한 상대 후보에게 패했다.
내 정치 경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패배였다. 그러나 나는 그때의 경선에서 결코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주적 절차와 원칙을 놓고 기성 정치권과 대결을 벌여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당시로선 일개 초선 전국구 의원이 당의 제왕적 총재인 대통령의 뜻에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른바 ‘3김 정치’에 익숙한 기성 정치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나는 그들과는 다른 이방인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