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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과 교류의 문을 열다이명박 | 2015.12.18 | N0.12

북방과 교류의 문을 열다
1988년 3월, 나는 46세에 현대건설 회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현대는 정주영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명목상으로나마 일선에서 후퇴하고, 2세 경영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여전히 정 회장이 현대를 이끌어가고 있었으나, 나는 당시 현대에서의 내 역할과 위상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나이는 젊었지만 정 회장과 같은 세대의 경영인이었다. 2세 경영시대에 원로 대접이나 받으며 세월을 허송할 수 없었다. 현대를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할 일을 고민했다.


그 무렵 북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있어 북방은 그동안 구소련과 중국, 북한으로 인해 막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업에 있으면서 전 세계를 무대로 사업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실제로는 지구의 반쪽인 공산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나는 기업과 국가경제 양쪽 모두에 활력을 주는 프로젝트가 저 광활한 시베리아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북방에 관심을 갖자 당시 한 미국 기업인이 내게 조언을 했다.


“공산국가와의 교류는 민간, 특히 기업이 해야지 정부 대 정부의 교류는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소련은 자원이 많은 나라이기 때문에 그러한 관점에서 관심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그의 조언을 듣고 나의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목적지는 정해졌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는 길이 없었다. 당시 소련과는 국교는 물론 어떤 공식적인 교류 창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업 활동을 하며 가진 여러 채널을 통해 모스크바로의 접근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던 차에 소련연방상공회의소의 책임자급 인사를 만날 기회가 생겼고, “곧 초대할 길이 열릴 것 같다”는 전갈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초청장이 날아올 날이 목전에 다가오자 비로소 나는 정주영 회장에게 처음 이야기를 꺼냈다.


“회장님, 소련 한번 갑시다.”


“비즈니스도 없는 공산국가에는 위험한데 뭐하러 가?”


정 회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필요성을 이야기했지만 그렇게 추운 나라에 뭐하러 가냐며, 나 혼자 다녀오라 했다.


1988년 겨울, 나는 정 회장과 함께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정 회장에게 그동안 구상한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했다.


“21세기에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게 될 것입니다. 소련은 세계에서 자원이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그 막대한 자원을 북한을 통해 육로로 가져올 수 있다면 우리 자원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북한이 길을 터주겠냐고 지레 체념하면 안 됩니다. 북한도 자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길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 회장은 그제야 내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뉴욕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나는 북방 진출의 당위성과 효과 그리고 역사적 의미를 정 회장에게 설명했다.


“그래? 그럼 한번 가자. 난 눈을 좋아하니까 눈 구경을 하는 것도 괜찮겠구먼.”


소련 방문을 위한 사전 작업은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 나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방문 교섭을 추진했다. 당시 소련은 한국의 적대국가였다. 국가안전기획부에 ‘경제적 차원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방문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 북한 핵 개발을 경고하다
1989년 1월 7일, 정주영 회장과 나를 포함해 우리 일행 다섯 명은 모스크바 땅을 밟았다. 소련연방상공회의소 측과의 협상이 시작됐다. 한·소 양국 기업들이 협력할 수 있도록 두 나라 간에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 첫 사업으로 현대가 시베리아 개발에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이를 위해 먼저 한·소 경제협력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소련 측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기업 차원에서의 조용한 투자였으며 경제협력위원회 같은 공식 창구를 만드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과의 관계를 신경 쓰던 소련은 공식 창구를 만들어 한·소 경제 협력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결국 협상은 성과 없이 끝났다.


소련과의 첫 협상에 실패했다고 해서 우리를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는 냉전시대였고 한국과 러시아의 경제 협력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날 저녁 나는 블라디미르 골라노프 소련연방상공회의소 수석부의장과 밤새 보드카를 마시면서 설득했다.


“우리는 순수 민간인 자격으로 왔기 때문에 어떤 정치적 의도도 없습니다. 북한을 자극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의 진심을 당신 정부 최고위층에 전달해주십시오.”


다음 날 오후 소련연방상공회의소 측에서 연락이 왔다. 협상이 재개되고 결국 1989년 1월 11일, 한·소 경제협력위원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한국과 소련이 사상 최초로 공식 문서에 공동 서명한 것이다. 첫 방문에서 물꼬가 트이자 이후 현대의 소련 방문은 줄기차게 이어졌다.


정 회장과 나는 소련 곳곳을 누비며 레닌그라드의 알루미늄 제련소 건설, 연해주 임산업 합자회사 설립, 석유화학제품 합작회사 설립, 올가 항 펄프제지 공장 건설, 옐킨스코어 석탄 개발과 철도 건설, 야쿠티야 가스 개발 등 굵직한 합의들을 이루어냈다.


1991년 11월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한국 기업의 소련 내 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자리에서 고르바초프는 깜짝 놀랄 만한 발언을 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당시에는 북한의 공업이 더 발달하고 국민소득도 높았습니다. 남한은 겨우 농업에 의존하는 수준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북한이 남한보다 가난합니다. 왜 그렇게 됐는지 아십니까? 북한은 공산주의를 채택했고, 남한은 자본주의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종주국 최고 지도자의 말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발언이었다.


“소련은 위성국인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과 협력하고 있지만 그 나라들은 다 못삽니다. 소련도 위성국들도 다 못삽니다. 이제 이런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아야 합니다. 소련과 한국이 협력해 사업을 하게 되면, 거기서 나오는 이익의 일부로 북한을 도와줍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르바초프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련이 지금처럼 바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가 도모할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또 북한을 가난한 상태로 방치하면 핵 개발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는 국가 안보에 관한 중대 사안이었다. 나는 고르바초프의 이야기를 정부에 전달했지만, 정부는 “북한은 그럴 능력이 없다”며 무시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북핵 개발의 시초였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때 정부가 위기의식을 갖고 제대로 대처했더라면,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르바초프를 만날 무렵, 바야흐로 냉전의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전후 세계구조를 바꾸는 거대한 전환이었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시대 변화를 주도한 선구자였다. 특히 냉전 종식이라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변화가 무력 충돌 없이 이루어진 밑바탕에는 고르바초프의 결단이 있었다.


만일 그때 소련이 전쟁을 통해서라도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면 어떤 비극이 발생했을까? 독일 통일도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고르바초프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에 대해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다. 그는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과소평가를 받고 있는 위대한 정치인이라 생각한다.


고르바초프는 내게 정치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했다. 동시에 나는 기업인으로서의 한계도 절감했다. 냉전질서가 붕괴되고 세계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상황에서 정치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기업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돼 있었다.


국내 상황도 급변했다. 1960~70년대에는 관 주도로 경제를 이끌 어갔지만 1980년대에 들어 이는 한계에 부딪쳤다. 경제 규모가 커지고 기업이 글로벌화하면서 정부의 간섭이 기업의 발목을 잡았다.


기업이 관료사회나 정치권보다 앞서나가기 시작하면서 정부의 개입이 경제발전의 걸림돌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신군부의 집권으로 사회갈등이 더욱 첨예화됐다. 정부의 경제에 대한 간섭은 비효율을 낳으면서 정부와 경제주체들 간의 갈등도 심화됐다. 일례로 노태우 정부 시절 북방정책으로 구소련과 중국과 국교를 맺기에 앞서 민간기업이 먼저 냉전 의 빗장을 풀었다. 정권 차원에서 북방정책을 추진하고 있던 정부와 정부보다 한발 앞서나간 현대그룹의 마찰은 불가피했다.


정주영 회장과의 결별
구소련에 처음 다녀왔을 때였다. 그때는 비행기가 도쿄를 경유했는데, 박철언 당시 대통령 정책보좌관이 도쿄로 사람을 보냈다. 한국에 돌아오면 구소련에서 거둔 성과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하지 말라고 했다. 기업이 먼저 문을 연 북방 외교 성과를 정부가 독점하려는 의도였다.


당시 세계로 뻗어나가던 기업들은 정부와 정치권에 불만이 많았다. 1995년 삼성 이건희 회장이 중국에서 “우리 기업은 2류, 정부는 3류, 정치는 4류”라고 발언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발언은 이 같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후일 정주영 회장의 대선 출마도 따지고 보면 그런 이유에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재계에서는 정 회장의 출마에 공식적으로는 반대했지만 ‘경제계 출신의 정치인’에 대한 암묵적인 공감대는 형성돼 있었다.


6·3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감옥에 갔을 때 나는 정계가 아닌 재계를 선택했다. 우리 국민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또 한 명의 정치인보다 번듯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기업인이라 생각해서였다.


현대 입사 당시 100명도 되지 않았던 직원이 퇴사할 때 16만 명이 됐으니 그 꿈을 어느 정도 이룬 셈이다. 현대를 떠나야 할 이유가 점차 명확해졌다. 마침 13대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계에서는 나의 국회의원 출마 여부가 논의됐다.


정 회장도 이 같은 상황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느 날 아침 정 회장이 내게 말했다.


“이 회장, 어려운 부탁을 해야겠소. 울산에 가서 노사분규를 해결해주시오.”


회사가 위기에 처했다는데 정 회장의 뜻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정치 입문을 미루고 울산으로 내려갔다. 정 회장은 후에 이때의 뒷이야기를 털어놨다.


“전두환 정권 때 당신을 상공부 장관으로 내달라고 했는데, 내가 반대했지. 그때 갔으면 뭐했겠어? 가지 않고 나랑 일한 게 더 좋지 않았어? 그리고 1988년 총선 때, 이 회장을 강남갑에 출마시키겠다고 하기에 ‘회사에 노사문제가 심각해 이 회장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고 내가 반대했어.”


정 회장의 솔직한 고백에 나는 “잘하셨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얼마 후 정 회장과의 결별의 순간이 다가왔다.


1991년 12월, 정주영 회장은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이듬해 1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정 회장은 내가 국민당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정 회장의 창당에는 반대했다. 정 회장의 추진력과 판단력, 개척정신, 검소하고 겸손한 자세 등은 높이 평가했다. 그가 만일 한국 최대 재벌의 총수가 아니었다면, 나는 그의 정치 참여를 지지했을 것이다. 그 어떤 정치인보다도 잘 해내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라는 재벌이 정치 참여를 통해 권력을 갖게 됐을 때 사회에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했지만, 재벌 총수가 대통령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것이 내가 정 회장의 창당에 반대한 이유였다.


나는 세 번 만류했다. 그러나 정 회장은 단호했다. 1991년 12월, 정 회장은 내게 최후통첩을 했다. 통일국민당 합류 여부를 12월 말까지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아, 이제는 정말 회사를 떠날 때가 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마지막 날, 나는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처음 으로 온 가족이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제주도에서 나는 가족들에게 현대를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1992년 1월 3일, 나는 현대그룹을 떠났다.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 현대에서의 27년을 50세의 나이에 끝낸 것이다.


당시 민자당 김영삼 대표는 플라자호텔에서 내게 제14대 총선에 서 서울 강남을에 출마할 것을 권했다. 전문경영인으로 성공한 기업인을 강남에 출마시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내세워 정주영 회장이 만든 통일국민당에 맞서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출마할 경우 결국 정 회장의 통일국민당과 맞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거절하고 유학을 준비했다. 그러던 차에 김영삼 대표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상도동 자택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김영삼 대표는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지역구로 나가면 국민당 때문에 곤란하다니, 우리 당 전국구로 나와 주시오. 우리 당에 전문경영인이 없어요. 이 회장이 필요합니다.”


1992년 5월, 나는 민자당 전국구 의원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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