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필기시험엔 합격했지만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몇 번의 실패 끝에 학생운동 전력 때문이란 걸 깨달았다.
절망에 빠져있던 중 신문 한 귀퉁이에 작은 광고를 발견했다. ‘해외 건설 현장에 나갈 역군 모집’이라는 내용의 현대건설 광고였다. 당시 현대건설은 직원이 100명도 되지 않는 중소기업이었다.
국내 기업에 취업할 수 없게 된 이명박에게 해외 건설현장은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혹시 정부가 알까 두려워 지인에게 부탁해 남모르게 원서를 냈다.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면접을 보는 날 정주영 사장의 ‘건설이 무엇이냐고 생각하냐?’고 물었다. 얼떨결에 ‘건설은 창조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건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정주영 사장은 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후 공개석상에서 자주 쓰곤 했다.
면접 분위기는 좋았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현대건설 인사과에 있는 지인을 통해 알아보니 예상대로 학생운동 전력 때문이라고 했다. 사정을 들은 둘째 형 이상득은 자신이 가정교사로 있던 국영기업체 사장의 신원 보증서를 받아 주었다. 그러나 큰 힘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고민 끝에 이명박은 편지를 한 통 썼다. 수신인은 ‘대통령 박정희’였다. 편지에서 학생운동의 순수성과 충정을 토로한 뒤, 사회의 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며칠 후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민정 담당 비서관 이낙선씨를 만나자 ‘국가체제에 도전한 자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명박은 ‘한 개인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길을 국가가 막는다면, 국가는 그 개인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이낙선씨를 만나고 며칠 후 현대건설로부터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었다. 후일 정주영은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명박이라고 있지요. 아주 고약한 녀석인데 정치권에 기웃거릴 줄 알았는데 현대로 갔더군. 인간 좀 만들어 보세요’라는 얘기를 해주었다”고 회고했다.
입사 후 이명박은 경남 진해 공사현장에서 잠시 근무한 후, 태국 파다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현장에 경리로 파견됐다. 나라티왓 고속도로는 한국 건설사상 최초의 해외공사로 일개 중소기업이었던 현대가 대기업도 하지 못한 일을 해 낸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경험 축적도 없이 의욕만 갖고 달려든 공사였기에 계획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첫 1년 동안 예정된 공사비의 70%를 쏟아 붓고도 공사는 겨우 30%밖에 진척되지 않았다.
위기는 결국 한국인 근로자들의 폭동으로 번졌다. 폭동이 일어나자 회사 간부들과 현장직원들은 모두 폭도를 피해 달아났다. 폭도들은 현장 사무실로 몰려들었고, 말단 경리사원인 이명박 혼자 사무실에 남아 금고를 지키며 폭도와 맞섰다.
대검으로 위협 받고 각목으로 폭행당하면서도 금고를 얼싸안고 엎드려 버텼다. 한참을 폭행당한 끝에 경찰에 의해 구조됐고, 이 일이 서울 본사에 알려지면서 말단사원의 무용담은 신화로 증폭됐다.
폭동이 진압된 후에도 태국공사는 적자는 누적되어 회사의 존립마저 위협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해외공사라는 데서 비롯된 들뜬 분위기로 현대건설은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지 못했다.
말단 경리직원이었던 이명박은 현장의 자료를 총동원하여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가 심각한 적자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를 받은 정주영은 현장으로 급히 달려왔다.
정주영은 현장에 부정이 있다고 생각했다. 부장과 과장, 그리고 말단 경리인 이명박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보고체계의 문제점 등이 밝혀졌다. 그 일로 이명박은 대리로 승진하고 현장 책임자가 됐다.
입사한지 2년도 채 안된 시기의 빠른 승진이었지만, 이 때의 첫 승진은 앞으로 있을 초고속승진의 시작에 불과했다.
태국공사는 끝났지만 적자는 예상보다 컸다. 그러나 월남전 호황에 이어 현대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참여하면서 태국의 참패를 만회할 수 있었다.
이명박은 귀국 후 서빙고에 있는 중기사업소 관리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본사의 경리부나 관리부 등 노른자위 부서로 배치될 줄 알았던 사원들은 의아해 했다.
“이명박 그 친구 잘 나가더니 끝난 거 아냐?”
그 때까지 중기사업소는 건설현장에 투입되는 장비를 수리하는 곳으로 대졸사원이 갈만한 곳은 아니었다. 임시직으로 들어온 사람, 현장에서 막 올라와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유배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주영 회장의 포석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우리 건설업의 전환점이었다. 이 때부터 사람의 노동력이 아닌 장비가 일하는 시대로 돌입했고, 따라서 중기사업소의 역할도 갈수록 막중해졌다.
그 곳에서 장비를 알기 위해 불도저를 해체하고, 청와대의 지시에 맞서 도로를 파헤치는 등 수많은 신화 같은 일화를 남기며 서빙고로 배치된 지 5년 만인 27살에 이사로 진급하여 본사로 들어갔다. 1970년의 일이다.
이명박이 입사할 때만 해도 직원 100명 수준의 중소기업이었던 현대건설은, 1970년대 들어 현대자동차와 울산조선소, 단양시멘트 등 굵직한 계열사를 거느린 대기업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이에 정주영은 창업멤버를 현역에서 퇴진시키고 젊은 인력을 경영진에 포진시켜 경영혁신을 달성하고자 했다. 그 신호탄이 된 것이 이명박의 초고속 승진이었다. 이명박은 이사가 되어 본사로 들어온 지 2년 만인 1972년 상무로 진급했고, 또 2년 후인 1974년에 전무로 승진했으며, 이듬해인 1975년 부사장으로 진급했다.
그러자 회사 안팎에서는 ‘박정희가 이명박 뒤를 밀어주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당시 박정희는 정주영을 만날 때 “이명박을 잘 지켜봐‘라고 말했다고 한다. 학생운동 출신이니 잘 감시하라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고속승진과 맞물리면서 ’뒤를 봐주라‘는 말로 와전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와 관련 정주영 회장은 언론을 통해 ‘내가 진급시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진급했다’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1973년 10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하면서 제1차 오일쇼크가 발생했다. 원유가가 1년 만에 4배 이상 오르자 세계경제는 큰 충격에 빠졌다. 전쟁의 폐허 속에 겨우 기지개를 켜던 한국경제도 외화가 바닥나 부도직전까지 몰렸다.
그러자 오일달러를 역류시켜 위기를 기회로 삼겠다는 생각이 현대건설에서 시작됐다. 오일달러가 중동으로 몰린다면 중동에 나가 달러를 벌어오자는 역발상이었다. 현대건설은 1975년을 ‘중동진출의 해’로 삼고 중동진출을 적극 모색했다.
그러나 바레인 정부가 발주한 1억 5천만 달러짜리 바스라 아랍 수리조선소 공사입찰을 추진하면서 현대건설은 갈등에 휩싸이게 됐다. 정주영의 동생이자 해외담당 사장인 정인영이 공사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정주영을 도와 조선소 입찰을 추진했고 결국 이 공사는 현대건설로 돌아왔다. 바스라 아랍 수리조선소 건설은 예정보다 공기를 앞당겨 마무리되었고 시공에 대한 평가도 대만족이었다.
중동선설의 가장 상징적인 공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로, 현대건설은 철 구조물을 울산조선소에서 블록으로 제작해 바지선에 싣고 아라비아 반도까지 운송하는 대담한 전략으로 세계 건설업계를 놀라게 했다.
이 무렵인 1977년, 정주영의 중동진출 구상을 실체화 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이명박은 현대그룹의 모기업인 현대건설의 사장으로 추대됐다. 그 때 나이가 35세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쥬베일 산업항 공사를 수주하는 과정에서 현대건설의 현지 사장과 지점장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선진국 건설업체의 견제에 의한 것으로 후진국의 건설업자가 국제사회에 뛰어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일로 현대에게 1억 달러의 벌금을 물리고 자국 공사 입찰 자격을 2년간 박탈하는 유례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명박은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로 수차례 드나들었지만 돌파구를 찾기 힘들었다. 결국 이명박은 새로운 시장을 찾기로 마음먹고 이라크로 눈을 돌렸다. 당시 이라크는 새로운 혁명정부가 들어서 개발에 박차를 가할 때였다.
이명박은 국교도 없는 이라크에 들어가 혁명정부 실세들과 친분을 쌓으며 7억 2천만 달러짜리 알무사이드 화력 발전소 공사 및 8억 2천만 달러짜리 사마라 팔루자 주택단지 공사 등을 따내며 사우디아라비아를 대신할 시장을 확보했다.
이 때부터 한국 종합상사들도 밀물처럼 이라크로 몰려갔고, 건설업도 제2의 중동특수를 꿈꾸게 되었다. 그러나 이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 9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기업들은 공들여 닦아놓은 건설시장을 서둘러 탈출해야 했다.
이명박도 1982년 정주영과 함께 포화 속의 이라크를 방문해 현장을 점검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전쟁이 가져온 고난은 우리에게 절망이 아닌 극복해야 할 또 하나의 과제였을 뿐’이라고 회상했다
1970년대 말, 말레이시아는 총연장 14.5킬로미터의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다리 건설을 계획 중이었다. 피낭대교는 총 공사비가 3억 달러가 넘는 대역사로 말레이시아의 숙원사업이었다.
피낭대교 수주를 원했던 이명박은 말레이시아를 자주 방문하여 고위층과 교류를 트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 업체가 말레이시아 정권을 구워삶고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던 차에 이명박은 마하티르 부수상을 만나게 됐다.
마하티르는 정치적 박해로 망명생활을 했다. 그로인해 국민여론이 들끓자 후세인 수상은 민심 수습용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여 부수상에 임명했다. 직위만 부수상일 뿐 당연히 실권은 없었다. 이명박은 그런 마하티르와 깊은 친분을 쌓았다.
1981년 초, 말레이시아 정부는 피낭대교 공사입찰을 시작했다. 최종입찰에는 프랑스 회사와 일본회사, 그리고 한국의 현대건설이 들어갔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정부 실세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일본 회사의 공세로 입찰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말레이시아의 후세인 수상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마하티르가 수상직을 승계하게 됐다. 개혁바람이 불면서 후세인 정권 관료들의 각종비리가 드러났고, 그 과정에서 일본 회사는 로비의혹이 부각되면서 밀려나게 됐다.
남은 것은 프랑스 회사로 입찰가는 현대건설보다 낮은 반면 공기는 길었다. 이명박은 현대의 공기단축이 더 큰 경제적 이익을 가져온다는 논리로 마하티르 내각을 설득했고 그 결과 피낭대교는 현대건설에 최종 낙찰됐다.
1980년 5월, 신군부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상임위원장으로 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했다.
당시 국보위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이라는 경제정책을 들고 나왔다. 국가 경쟁력 향상을 위해 중화학공업 중복 투자를 통합한다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으로 현대는 자동차와 발전설비 중 한 가지를 포기해야 했다.
신군부는 현대에게 자동차를 포기하기를 종용했다. 그 일로 이명박은 보안사에 세 차례나 불려 다니며 온갖 외유와 협박을 받았다. 그러나 이명박은 끝까지 버티며 현대자동차를 지켜냈다.
결국 국보위는 자동차 산업 통합 문제를 자신들 뜻대로 이끌어가지 못했고, 상공부로 현안이 이관되면서 자동차 산업은 통합되지 않았다.
당시 국보위의 뜻대로 되었다면 오늘날 세계를 누비는 현대 자동차를 볼 수 없었을 것이다. 5공 초기 현대그룹과 신군부의 관계는 이 일로 매우 악화되었으며 당시 전경련 회장이었던 정주영은 사퇴까지 종용받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정주영에게 권력에 대한 환멸과 동경이라는 모순된 정서를 심어주었고, 결국 1992년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계기가 된다.
1988년 3월, 이명박은 46세의 나이로 현대건설 회장이 됐다. 이 무렵 이명박은 북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구소련이 붕괴되기 전으로 한국은 공산국가와의 교류가 전무했다.
이명박은 기업활동을 하면서 얻은 여러 채널을 통해 모스크바에 접근했다. 결국 소련 정부로부터 초청장을 받아내고 정주영을 설득하여 1989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소련 연방 상공회의소 측과 협상을 통해 한-소 경제협력위원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이어 정주영과 소련 곳곳을 누비며 레닌그라드의 알루미늄 제련소 건설, 연해주 임산업 합자회사 설립, 석유화학제품 학작회사 설립, 올가 항 펄프제지 공장 건설, 옐큰스코어 석탄개발과 철도 건설, 야쿠티야 가스 개발 등 굵직한 합의를 이루어 냈다.
1991년 11월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한국 기업의 소련 내 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자리에서 고르바초프는 북한이 한국보다 가난한 이유가 공산주의를 채택한 탓이라고 말해 일행을 놀라게 했다.
또한 고르바초프는 북한을 가난한 상태로 방치하면 핵 개발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명박은 이 이야기를 당시 정부에 전했지만 정부는 ‘북한은 그럴 능력이 없다’고 무시했다.
1991년 12월, 정주영은 신당 창당을 선언하고 이듬해 1월 ‘통일국민당’을 창당했다. 1992년 12월에 있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정주영은 이명박이 통일국민당에 합류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명박은 재벌 총수가 대통령이 될 경우 사회에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정주영의 창당을 반대했다. 정주영은 세 변을 권했고 이명박은 세 번 모두 거부를 했다. 그 결과 1992년 1월 현대를 떠나게 됐다.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을 거친 현대에서의 27년을 50세의 나이에 끝낸 것이다. 이명박의 현대생활을 두고 사람들은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신화는 없다’고 말한다.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만 신화일 뿐이며, 본인에게 있어서 현대에서의 삶은 겹겹의 위기와 안팎의 도전으로 둘러싸인 냉혹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시련이라는 험한 파도 앞에서 좌절하거나 우회하지 않고 도전을 하고 돌파를 했던 그 용기를 사람들은 신화라고 부른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