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은 1941년 12월 19일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 이충우와 채태원 사이의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충우는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가 고향인 가난한 목부(牧夫)였다. 식민지 조국의 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충우는 젊은 시절부터 일거리를 찾아 타향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근교의 목장에 고용됐다.
타국에서의 목부생활은 고달프고 서러웠지만 부지런히 일에만 전념했다. 저축도 하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반야월 출신의 채태원을 신부로 맞았다. 결혼식을 올린 지 얼마 안 돼 부부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충우 부부가 살던 조선인 부락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핍박이 극심한 곳이었다. 그 곳에서 부부는 열심히 일하며 여섯 남매를 낳아 키웠다.
2007년 17대 대선 때, 다른 형제들은 모두 상(相)자 돌림이지만 혼자만 이름이 ‘명박’이란 이유로 상대진영으로부터 ‘배 다른 일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는 공격을 받았다. 결국 DNA 검사까지 받아 공세가 거짓임을 밝혀야만 했다.
돌림자를 따르지 않은 이유는 어머니의 태몽 때문이다.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는 이름을 ‘밝을 명(明), 넓을 박(博)’자를 넣어 지은 것이다. 그러나 족보에는 돌림자를 딴 ‘상정’(相定)으로 올라 있다.
1945년 11월, 여덟 명의 가족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모노세키 항으로 향했다. 광복이 된지 3개월이 지났지만 항구는 귀국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정기여객선은 표를 끊고 수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다행이 임시로 마련된 낡은 목조어선을 타고 귀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짐짝처럼 실려 뱃멀미에 고생했지만 모두들 들떠 있었다. 마침내 광복을 맞아 꿈에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뱃길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귀국선은 대마도 앞바다에서 침몰하고 말았다. 배에 실은 짐들은 모두 수장됐다.
해방 후 이듬해까지 시모노세키 등지에서는 160여만 명의 한국인들이 귀국선을 타고 돌아왔다. 하지만 귀국길은 순탄치 않았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10t 미만의 작은 어선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다 배가 침몰해 목숨을 잃었다. 일본 정부가 제공한 4730톤 급 군함 ‘우키시마호’에 탔다가 원인 모를 폭발로 수천 명의 한국인이 목숨을 잃은 사건도 있었다.
이충우 일가는 모두 구조됐지만 차별과 핍박 속에서 어렵사리 모은 몇 푼 안 되는 전 재산을 잃어야만했다. 무일푼으로 고국 땅을 밟은 것이다. 그 당시 이명박의 나이 4살이었다.
귀국 후 가족은 포항에 자리 잡았다. 부모님은 행상과 노점상을 하며 열심히 일했지만 가난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포항 근교의 목장에 일자리를 얻으며 생활은 다소 안정됐고 막냇동생도 태어났다.
그러나 아홉 식구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6.25가 터지며 아버지는 실직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둘째누이와 막냇동생이 미군 비행기의 폭격에 맞아 사망했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가족은 산기슭 절터에 옮겨 살았다.
초등학교 때 이명박은 이미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성냥개비에 황을 붙여 팔기도 했다. 군부대 철조망 밖에서 군인들에게 김밥과 밀가루 떡을 팔다가 헌병에게 붙잡혀 매를 맞기도 했다.
술지게미로 끼니를 때우며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영양실조에 걸려 4달 동안 몸져눕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남들보다 머리 하나씩은 더 큰 장신인 형제들에 비해 이명박은 173센티미터로 상대적으로 단신이었다. 다만 팔 길이는 보통 사람들보다 10센티미터는 긴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