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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1번지’ 종로에서 당선되다이명박 | 2016.01.06 | N0.14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당선되다
1995년 6월 27일 실시된 지방선거는 정계 개편을 촉발시켰다. 그해 3월 김종필 의원은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그리고 자민련은 지방선거에서 충청권을 휩쓸었다. 민자당 내 민정계 일부 의원은 탈당해 자민련에 입당했다. 1996년 전두환, 노태우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구속한 사건을 계기로 민자당은 당명을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지방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씨는 그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민주당 내 호남 출신 의원들은 대거 탈당해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민주당은 이기택, 노무현 의원 등이 주축이 되어 당명을 통합민주당으로 바꾸었다.


정계 개편을 마친 각 정당은 1996년 치러진 제15대 총선 체제에 돌입했다. 나는 서울 강남과 종로에서 출마하는 것이 거론되고 있었다. 당시 종로에서는 이종찬 의원이 내리 4선을 하고 있었다. 야당 측에선 5공 청문회 스타인 노무현 의원이 출마한다고 했다.


이종찬 의원은 19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 후보와 겨뤘고, 결국 탈당했다. 민자당 지도부와 김영삼 대통령으로서는 그런 이력을 가진 이종찬 의원을 떨어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권 후보들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정계에서 잔뼈가 굵은 내로라하는 정치인들도 ‘정치 1번지’ 종로 출마를 마다했다. 후보를 찾지 못한 당은 내게 종로 출마를 권했다. 정치 신인인 내가 종로에서 당선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왕 정치를 할 거면 손쉬운 강남보다 정치 1번지 종로에 도전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이 의원, 종로에서 당선되면 당신은 차기 대통령 후보야!”


당내에서는 그런 소리까지 나왔다. 그만큼 종로 당선이 힘들다는 의미였다. 나는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허황된 공약을 내세우거나 상대 후보를 비방하기보다는 유권자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노력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숭인1동 궁안마을 유세다. 종로에서도 가장 어려운 지역인 이 마을은 주민 80퍼센트 이상이 호남 출신으로, 역대 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득표 활동은커녕 유세도 한 적이 없었다. 참모들도 궁안마을은 표를 얻기 힘든 곳이니 유세를 할 필요가 없다며 만류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궁안마을 주민들도 종로구민이었다. 젊은 시절 막노동판에서 일당 노동자로 일했던 나는 누구보다도 그들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직접 부딪쳐보기로 결심했다.


궁안마을에서 유세를 시작하자 주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신한국당 후보의 유세는 듣지도 보지도 않겠다는 자세였다.


“이 지긋지긋한 가난, 다른 누구도 극복하게 해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노력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나는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허황된 공약 대신, 내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진심을 궁안마을 주민들에게 전했다.


“가난을 여러분 세대에서 끝내야지 자식들 세대까지 물려줘서야 되겠습니까? 그런 여러분의 심정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진심이 통했는지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가난했던 내 과거와 그 가난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들려주면서 대안을 제시했다. 결국 나는 궁안마을 주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선거 결과는 예상 밖의 대승이었다. 나는 40.5퍼센트를 득표해 33퍼센트를 얻은 이종찬 후보, 17퍼센트를 얻은 노무현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무엇보다도 종로에서의 승리는 지역감정이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아니라 깨뜨릴 수 있는 장애물에 불과하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새로운 정치의 시작이었다.



의원직을 사퇴하다
한편으로 종로에서의 화려한 승리는 기성 정치권의 나에 대한 견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야권은 물론 14대 대선 TV 찬조연설과 서울시장 경선 과정에서 비롯된 당내 반감의 잔재도 남아있었다.


결국 나는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당해 1심과 2심 재판에서 의원직 상실형에 해당하는 벌금형을 받았다. 나는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의원직에 집착하고 연연할 이유가 없었다.


국회의원직 사직서를 들고 김수한 국회의장을 찾았다. 그는 깜짝 놀라며 만류했다.


“정치 경험이 짧아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시간을 끄세요. 다른 국회의원들도 다 그렇게 합니다.”


“제가 여기 오면서 그런 생각을 안 했겠습니까? 처리해주십시오.”


당시 관행처럼 재판을 지연시켜 국회의원직을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국회의원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치 1번지인 종로에서 화려하게 당선된 것에 미련을 둘 일은 아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일찌감치 그만두고 새 출발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의원직을 사퇴한 나는 1998년 11월 15일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 객원연구원으로 초청을 받아 한국을 떠났다. 처음에는 정계에서 쫓겨나 망명자의 길로 접어든 것 같아 마음이 착잡했다. 그러나 기업인 시절부터 오랫동안 교류해온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마드(Mahathir Mohamad) 총리를 생각했다.


그는 총리가 되기 전 해외 망명 시절에 비디오카메라 한 대를 들고 세계 곳곳의 산업 현장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나는 마하티르 총리처럼 절망감에서 벗어나 미래를 준비하는 값진 휴가를 갖자고 마음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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