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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 사장이명박 | 2015.12.11 | N0.10

도로를 파헤치다
나는 불도저를 해체했을 뿐만 아니라 손수 몰아본 적도 있다. 당시 서빙고 중기사업소 옆에는 골재 생산업체인 공영사 공장이 있었다.


공영사 역시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골재를 공급하고 있었다. 문제는 골재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분진이 기계와 상극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현대건설 중기사업소와 공영사 사이에서는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공영사는 분진 방지 시설을 설치하겠다는 약속을 번번이 지키지 않았다.


그날도 공영사는 약속을 어기고 야간작업까지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야간 정비를 못하게 되자 나는 공영사에 전화를 걸었다. 앞으로 두 시간 후까지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물리적인 방법을 쓰겠다고 경고했다.


“청와대의 지시로 야간 작업을 하는 것이니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시오.”


청와대가 시킨 일을 하고 있는데 네가 어쩔 거냐는 말이었다. 경고한 두 시간이 지나도 공영사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나는 직접 불도저를 끌고 공영사 진입도로로 들어가 공영사가 골재를 실어 나르는 도로를 깊숙이 파헤쳐버렸다. 꼼짝 못하게 된 공영사는 즉시 청와대로 연락했다. 청와대 비서실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 당장 도로를 원상 복귀하라고 윽박질렀다.


“공영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취한 조치입니다. 골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중장비를 투입할 수 없으면 고속도로 공사에 막대한 차질이 생깁니다.”


청와대도 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결국 하루가 지나자 공영사는 무릎을 꿇었다. 방진시설을 갖춘 후 작업을 하기로 약속했다.


나는 파헤친 도로를 원상 복귀시켰다. 나중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을 알고 본사에서 전화가 왔다.


“본사 지시도 받지 않고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질렀나?”


“이런 일은 현장에서 책임지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본사가 알았다면 어떻게 청와대와 맞설 수 있겠습니까?”


협력업체와의 의견 충돌로 도로를 파헤쳐버리거나 청와대가 직접 기업에 작업 지시를 내리는 것은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경부고속도로 공사는 전투나 다름없었다. 대통령이 총사령관이었다면 정주영 사장은 야전사령관이었다. 그 치열한 전투 끝에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값싼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인프라 투자는 고속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그 같은 인프라 투자가 있었기에 ‘한강의 기적’도 가능했던 것이다.



35세 사장
중기사업소 관리부장을 맡고 2년여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본사 총무부에서 코티나 승용차 한 대를 중기사업소로 보냈다. 현대에서 만든 자동차였다.


“이 차 뭐야? 누구 타라고 보내온 거야?”


“아니, 이사님으로 발령 난 것 모르십니까? 사흘 전에 인사 발령이 났습니다. ‘이명박 이사님’ 타시라고 보내온 차죠.”


현대건설에 입사한 지 5년, 내 나이 28세 때의 일이었다. 모두가 유배지로 여겼던 중기사업소였다. 나는 그곳에서 2년 만에 차장, 부장을 거쳐 이사로 승진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정주영 사장은 일언반구도 없이 나를 승진시키고 새로운 직책을 맡겼다. 사전에 승진 사실을 알았던 것은 사장이 될 때 한 번뿐이었다.


내 고속 승진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어떤 일에 내가 필요한데 그 일을 맡기에는 내 직급이 너무 낮을 때가 있다. 그럼 정 사장은 나를 승진시켜 일을 맡기곤 했다. 내가 승진한다는 것은 곧 새로운 일을 맡는다는 의미였다.


“내가 승진시켰나? 혼자 스스로 승진한 거지.”


후일 나를 고속 승진시킨 이유에 대해 정주영 회장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이사로 진급하여 본사에 들어온 지 7년 만에 나는 상무와 전무, 부사장을 거쳐 사장이 됐다. 1977년 내 나이 35세, 현대건설에 입사한 지 12년 만의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명박 뒤를 밀어주고 있다.”


젊은 나이에 현대건설의 사장으로 승진하자 회사 안팎에서는 그런 소문이 나돌았다. 물론 낭설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정주영 사장을 만날 때 “이명박이를 잘 지켜봐”라고 말했다 한다. 6·3 민주화운동 주동자 중 하나이니 잘 감시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이 말이 내 고속 승진과 맞물리면서 ‘뒤를 봐주라’는 의미로 와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사장으로 승진하는 동안 현대건설도 변했다. 입사 당시 직원이 100명도 안 됐던 현대건설은 이제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종합상사 등 굵직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 모회사로 거듭났다.


1973년 이후 연속적인 석유 파동으로 한국이 국가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 중동 진출로 돌파구를 연 것도 현대건설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항상 최전선에 있었다. 세계 각국을 누비며 하루 16시간 이상 일했다. 사람들은 내가 12년 만에 사장이 됐다지만, 나는 남보다 두 배로 일했으니 24년 만에 사장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내 사장 승진은 그리 빠른 편도 아니었다.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그만큼 열심히 일할 자신이 없다.


“정주영 회장이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것 같아. 현대건설에 30대 사장을 앉히다니, 망하려고 작정한 것 아냐?”
내 사장 승진을 놓고 재계에서는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연공서열이 지배하던 사회였다. 30대면 기껏해야 과장이나 부장 직위에 있을 때였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그런 우려도 당연했다.


그러나 재계의 우려와 달리 현대그룹은 내가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매출 면에서 한국 최대 기업으로 등극했다. 현대그룹이 중동 경기를 이끌면서 재계의 판도를 바꿔놓은 것이다. 한마디로 승승장구였다. 현대그룹의 앞날은 창창할 것 같았다. 그러나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연이어 12·12 사태가 터지며 현대그룹은 중대 위기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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