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반대 속에 시작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타이 고속도로 공사는 예상보다 더 큰 손실을 남겼다. 월남전 특수가 없었다면 현대건설은 한동안 재기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손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최초의 해외 공사였던 이 공사는 한국 건설회사들이 외국에 진출하는 시발점이 됐다. 또한 현대그룹이조선과 자동차 사업 등 대외지향적 사업으로 뻗어가는 계기가 됐다.
타이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해본 경험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도전하는 밑거름이 됐다. 1964년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독일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귀국 후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했다.
당시 국내에는 고속도로란 개념조차 없었다. 박 대통령은 건설부와 군 공병대 등에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용을 산출하도록 지시했다.
건설부는 650억 원, 군 공병대는 440억 원을 제시했다. 그 시절 1년 정부 예산이 1,800억 원 수준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위해서는 1년 국가 예산의 25~35퍼센트에 달하는 돈을 투입해야 했다. 우리 정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정부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 차관을 요청했다. IBRD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결론은 ‘기존 도로를 포장해서 활용하라’였다. 당시 교통량을 분석한 결과 한국에는 고속도로를 건설할 필요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정부로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이 타이에서 고속도로 공사를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곧바로 정주영 사장을 청와대로 불러 경부고속도로 건설 견적을 내보라고 지시했다.
현대건설이 산출한 견적은 380억 원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 정도 금액이라면 차관 없이도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경부고속도로는 1968년 2월 착공되어 1970년 7월 완공됐다. 총 공사비는 429억 원이 들었다. 추가 비용은 고속도로 아래 ‘터널식 통로’ 등 부대시설을 짓는 데 소요됐다.
자본도 기술도 장비도 부족했던 그때, 한국에게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걸림돌은 국내 반대 여론이었다. 당시 언론과 학계, 야당은 물론 여당과 정부 고위 간부들조차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고 나섰다. 학원가에서는 연일 반대 시위가 열렸다. “대원군이 경복궁을 만들다 망한 것처럼 박정희는 경부고속도로를 만들다 망할 것”이라는 악의적인 비난까지 터져 나왔다.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된 후에도 그 같은 비난은 한동안 계속됐다. 개통되고 몇 년간 교통량이 적어 고속도로가 텅 비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하자보수로 문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국토의 대동맥으로 산업화에 기여하고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만든 공로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정치 지도자와 저명인사들이었다. 그중에는 후일 대통령이 된 분들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한 유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인천국제공항 건설을 반대했고 서울시 버스준공영제 도입을 반대했으며 청계천 복원에 반대했다. 지금 인천국제공항은 ‘세계 1위 공항’으로 도약했다.
버스중앙차선제와 환승할인제도로 서울 시내버스는 시민에게 사랑 받는 교통수단으로 거듭났다. 청계천은 세계가 주목하는 서울의 명소로 등극했다.
그때마다 반대하던 그 사람들은 이제 준공된 지 3년 남짓 된 4대강 사업을 맹비난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인천국제공항 등 굵직한 국책 사업들이 제대로 평가받는 데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4대강 살리기 사업 역시 올바른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는 바뀐 환경에 새로운 생태계가 자리 잡고, 수해나 가뭄 등에 대한 데이터를 확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은 9장에서 자세히 언급하겠다.
일을 장악하다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고 한 달이 지난 1968년 3월, 나는 타이 공사를 마무리 짓고 귀국했다. 정주영 사장은 나를 서빙고에 있는 중기사업소 관리과장으로 발령 냈다. 중기사업소는 건설 장비를 수리하는 곳으로 고졸 기술직이나 기능직 사원들이 주로 배정되는 곳이었다. 대졸 관리사원의 발령은 이례적이었다.
“이명박 저 친구, 잘나가더니 이제 끝난 거 아냐?”
회사 내에서는 내 인사 발령을 놓고 말이 많았다. 본사 요직에 배치될 거라 기대했던 나 역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나를 중기사업소 관리과장으로 발령 낸 데는 경부고속도로 착공 후를 내다본 정 사장의 사전 포석이 깔려 있었다.
그 전까지 중기사업소는 미8군이 쓰다 버린 고물을 수리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경부고속도로가 착공되면 중기사업소의 역할이 달라진다. 고속도로 현장에 최신 장비를 투입하는 건설의 젖줄로 변신하게 된다. 정 사장은 그 같은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나를 그곳으로 발령 낸 것이었다.
정 사장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내게 전화를 했다. 소장도 있고 기술 분야의 과장들도 있었지만 번번이 나를 찾았다. 그때마다 나는 정 사장의 전화에 제대로 응대할 수 없었다. 장비의 이름과 성능, 부품 등을 모르는 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왜 그렇게 부품 수리가 늦어? 제대로 알지도 못하니까 자꾸 늦어지는 것 아니야!”
전화가 올 때마다 나는 정 사장에게 야단을 맞았다. 어떤 때는 직접 중기사업소를 방문해 한바탕 호통과 난리를 친 후 돌아가기도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어느 날, 나는 갓 수입한 신형 HD16형 불도저 한 대를 완전히 해체했다. 당장 수리해 현장으로 보내야하는 장비였다. 나는 매뉴얼을 펼쳐놓고 부품 하나하나를 숙지한 뒤 다시 조립해나갔다. 무사히 조립을 마치고 나니 불도저의 구조와 부품을 훤히 꿰뚫을 수 있게 됐다. 다른 장비에 대한 이해도 높아졌다.
“뭐 하는데 불도저를 안 보내? 왜 그렇게 늦어?”
아니나 다를까 정 사장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제가 몽땅 해체했다 재조립하느라 늦어졌습니다.”
정 사장은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는지 더 이상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건설회사에서 잔뼈가 굵으려면 장비를 잘 알아야 한다. 관리 사원이었던 나는 장비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건설 장비에 대해 자신이 생겼다. 장비를 알게 되자 정비공들도 내말을 존중했다. 업무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