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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귀하이명박 | 2015.12.04 | N0.7

2 현대에서 보낸 27년


박정희 대통령 귀하

감옥에서 나온 뒤 대학에 복학했다. 학교 측에서는 학생운동 주동자에 대한 배려로 졸업시험을 면제해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감옥에서 결심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의 길을 포기하고 경제의 길로 가려면 무엇보다 실력이 뒷받 침되어야 했다. 나는 감옥에서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내 실력을 정당하게 평가받고 싶었다. 졸업시험 결과는 좋았고 나는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월급이 많지 않아도 좋다. 한 달 일하고 월급 받는 일자리를 갖고 싶다.’


막노동을 하던 시절, 그 같은 생각에 대학시험을 쳤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일자리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입사시험에서 필기는 통과했지만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내 학생운동 전력이 취업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부가 내 취업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땅에 더 이상 발붙이기 힘들겠구나.’


나는 절망에 빠졌다. 그러던 중 신문 한 귀퉁이에서 작은 광고를 하나 발견했다. ‘현대건설’이라는 당시로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건설회사의 채용 광고였다. 현대건설이 대기업이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다. 당시는 직원이 100명도 되지 않는 중소기업에 불과했다.


“해외 건설 현장에 나갈 역군 모집.”


그 광고가 눈길을 끈 것은 순전히 ‘해외로 나간다’는 문구 때문이었다. 6·3 민주화운동 주동자로 중앙정보부의 감시대상자로 분류되어 대기업에 취업할 수 없게 된 내게 해외 건설 현장은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1965년 5월, 나는 현대건설에 입사원서를 냈다.


혹여 정부가 알면 또 방해할까 걱정되어, 지인에게 부탁해 남모르게 낸 원서였다. 필기시험에 합격해 면접을 보았다. 그날 정주영 사장을 처음 만났다.


“학생은 건설이 뭐라고 생각해?”


정 사장의 질문에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건설회사에 다니려고 현대건설에 지원한 것이 아니었다. ‘해외’라는 말에 마음이 동해 임시방편으로 지원한 회사였다. 건설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았을 리 만무했다.


“건설은 창조입니다.”


얼떨결에 대답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건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정 사장은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건설회사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지원했냐?’는 의도로 던진 질문이었다.


후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이 된 정주영 사장은 강연할 때마다 이 말을 언급하곤 했다. 내 답변이 정 사장에게 각인된 것 같았다.


면접 분위기는 좋았다. 이 정도면 합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또다시 ‘함께 일할 수 없게 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답답해하던 차에 어느 날 현대건설 인사과에 있는 학교 선배를 만나 자세한 속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6·3 민주화운동 주동자여서 중앙정보부 관리대상자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선배는 어떤 시험을 봐도 안 될 것이라 말했다. 분하고 억울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편지 한 통을 썼다. 수신인란에 ‘박정희 대통령귀하’라고 적었다. 나는 시위를 주도한 이유를 설명하고 순수성과 충정을 토로한 뒤, 취직할 수 없게 막고 있는 정부의 처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큰 기대는 없었다. 단지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얼마 후 청와대 이낙선 민정비서관으로부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이 비서관은 5·16 주도세력의 한 사람으로, 나중에 초대 국세청장과 상공부 장관, 건설부 장관을 지냈다. 이 비서관의 입장은 확고했다. 국가 체제에 도전한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당연지사라 했다. 그만한 각오도 하지 않고 학생운동을 했느냐고 나를 꾸짖었다.


그러면서 이 비서관은 국비 유학을 보내줄 테니 외국에 나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당시에는 운동권 학생들을 국비 유학생으로 외국에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실상 유배나 다름없었다.


나는 이 비서관의 제안을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무엇보다 내가 맞서 싸운 정권의 도움으로 유학 가는 것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나는 내 실력으로 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겠다고 버텼다. 결국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헤어졌다. 그 후 이 비서관을 다시 만났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절망감에 빠진 나는 그와 헤어지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국가가 자기 힘으로 살아가겠다는 젊은이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면, 국가는 그 젊은이에게 영원한 빚을 지는 겁니다.”


이 비서관은 내 말을 듣고 다소 놀라는 눈치였다. ‘결국 다시 일당노동자로 돌아가야 하는구나.’ 청와대를 나오면서 이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뜻밖에도 현대건설에서 합격 통보가 날아들었다. 7월 1일부터 출근하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이 비서관에게 마지막에 던진 말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됐다고 한다.


그 결과 청와대는 현대건설이 매달 내 동태를 중앙정보부에 보고하는 조건으로 입사를 허락했다는 것이다. 나는 정주영 회장에게 이 사실에 대해 아는 체하지 않았다. 정 회장도 평생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목숨 걸고 금고를 지킨 말단사원
현대건설에 입사해 처음 발령받은 부서는 본사 공사관리부였다. 나는 일당 노동자에서 벗어나 매일 출근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즐겁고 감사했다. 일이 즐거우니 남보다 몇 곱절 더 일해도 지치거나 몸져눕지 않았다.


그해 12월 해외 발령이 났다. 타이 빠따니-나라티왓 고속도로(Pattani Narathiwat Highway) 공사 현장이었다. 이 공사는 한국 건설사상 최초의 해외 공사였다. 타이 정부가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차관 사업으로 계획한 공사였다. 현대건설은 16개국 24개사와 경합을 벌인 끝에 최저 낙찰가로 공사를 따냈다. 일개 중소기업이었던 현대건설이 대기업도 못한 일을 해낸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주영 회장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사람이 해외 진출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으니 말이다. 그 당시 우리는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가발을 수출해 달러벌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 기업이 외국에 진출하는 것은 일대 혁신이었다.


공사금액은 522만 달러로 당시 현대건설의 한 해 매출액보다 많은 액수였다. 현대건설은 이 공사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의욕만으로 경험 부족을 메울 수는 없었다. 첫 해 동안 예정된 공사비의 70퍼센트를 쏟아 붓고도 공사는 30퍼센트밖에 진척되지 않았다. 게다가 현장 인부들 사이에는 회사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갔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타이인 경리직원들과 함께 사무실에서 밀린 장부를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웠다. 한 직원이 창 밖을 내다보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미스터 리, 빨리 도망가!”


한국 인부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한국에서 인부를 모집할 때 인천 지역의 폭력배들이 대거 포함됐다. 해외 공사 현장의 특혜를 독차지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 취업이었던 셈이다. 폭동은 그들이 주도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폭도들은 군용 단도를 휘두르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현장 간부들이 자동차를 타고 도망가는 모습도 보였다. 급기야 사무실에 함께 있던 타이인 경리직원들도 모두 도망갔다. 폭도들이 난입했을 때는 나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폭도들은 군용 단도로 나를 위협하고 금고 열쇠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나는 금고를 껴안은 채 한사코 버티다 무자비하게 구타를 당했다. 사실 금고 안에 많은 돈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를 위한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폭력앞에 무릎 꿇기 싫었을 뿐이다.


그때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폭도들은 후다닥 사무실 밖으로 도망쳤다. 경찰과 함께 들이닥친 직원들이 금고를 껴안고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켰다. 말단사원이 목숨을 걸고 금고를 지킨 사건은 곧 서울 본사에 알려졌다. 이야기는 회자되며 신화처럼 부풀려졌다. 이 일은 현대건설에 내 이름을 인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지금도 가끔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자문한다. 그것은 아마도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항상 꼿꼿하셨던 어머니. 감옥에 있는 아들을 보고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보면서 자란 덕분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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