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이야기
HOME > 짧고도 긴 역사 > 회고록 이야기
옥중에서 만난 어머니이명박 | 2015.12.02 | N0.6

학생회장에 출마하다


부끄럼 많고 내성적인 내 성격이 활달하고 외향적으로 바뀌게 된 건 대학 때의 일이다. 대학 입학 후에도 내 생활은 큰 변화가 없었다. 고려대에 동지상고 야간학부 출신은 나 혼자뿐이라 동창회도 없었다. 이태원 시장에서 청소일을 하느라 동아리 활동을 할 시간도 없었다. 꼭두새벽에 시장에 나가 쓰레기를 싣고 이태원 언덕을 몇 차례 오르내리는 일은 당시 20대 초반의 내게도 무리였다.


새벽부터 고되게 일하고 학교에 갔으니 수업시간엔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내 몸에서 늘 쓰레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것이 미안해 항상 뒷자리에 앉았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이러다 대학을 졸업해도 나를 알아보는 동창생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닐까?’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갑작스럽고도 엉뚱한 생각이었지만 당시로선 심각했다. 때마침 학생회장단 선거가 있었다. 고민 끝에 나는 상대 학생회장에 출마하기로 마음먹었다. 떨어지더라도 선거운동을 하다 보면 많은 학생들이 나를 기억하게 될 거라 믿었다.


대학 학생회 선거에도 돈이 필요했다. 나는 돈이 없다 보니 선거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선거운동을 하면서 의외로 내가 학교에서 유명했단 사실을 알게 됐다. 입학해서 3년 동안 사시사철 까맣게 물들인 군복 하나만 입고 다닌 덕이었다.


“저 선배는 뭔가 다른 것 같아.”


이런 생각을 가진 저학년 학생들이 내게 표를 몰아주었고 그 덕분에 상대 학생회장에 당선됐다. 돈이 없어 단벌로 다녔는데 그것이 오히려 선거에 도움이 된 것이다. 상대 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나는 부끄럼 많고 내성적이던 성격을 바꿀 수 있었다.



6·3 민주화운동의 주동자로 투옥되다


당시 대학가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연일 시끄러웠다. 그때까지 나는 학비며 생활비를 버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단과대 학생회장 당선은 내 현실 밖의 문제에도 관심을 돌리는 계기가 됐다.


1964년 4학년이 되었을 때 한일회담 반대 투쟁은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은 반대 투쟁에 소극적이었다.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상대 학생회장인 나와 법대 학생회장인 이경우가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을 맡기로 결정됐다.


당시 나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양국 간의 민족사적 문제를 단순한 경제 논리로 덮어버릴 순 없다고 생각했다. 서울 시내 대학 총학생회장들과 만나 시위를 준비했다. 1964년 6월 3일 정오를 기해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연합하여 한일회담 반대 가두시위를 벌인다는 계획이었다. 3일 정오 서울 거리에는 1만 2,000여 명의 대학생이 운집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른바 6·3 민주화운동이었다.


정부는 이날 저녁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나를 비롯한 시위 주동자들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졌다. 나는 급히 도망쳐 형 친구 신혼 단칸방에 신세를 졌다. 얼마 안 가 다시 한강다리를 건너 부산으로 향했지만 거기에도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돈 한 푼 없이 남에게 신세지는 것도 할 일이 못 됐다. 무엇보다도 억울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도망을 다니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서울로 돌아와 당당하게 내 발로 경찰서를 찾아갔다. 그리고 내란선동죄로 5년형을 구형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1964년 6월에 시작된 형무소 생활은 그해 10월에 끝났다.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됐다. 이 일로 나는 신문에 여러 차례 오르내리며 유명인사가 됐다. 석방 후 외가 친척이 내 주소를 몰라 ‘서울시 용산구 이명박 앞’이라 적어보낸 사과 궤짝이 내가사는 단칸방에 정확히 배달되었을 정도다.



옥중에서 만난 어머니


형무소 생활을 할 때 어머니는 딱 한 번 면회를 오셨다. 면회실까지 걸어가는 동안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에 들어간 자식이 감옥에 갇혔으니 얼마나 놀라셨을까? 뭐라고 해야 어머니가 안심하실까?’


그러나 면회실에서 흰색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고 꼿꼿하게 앉아계신 어머니를 보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정이 복받칠 뿐이었다. 어머니는 병색이 완연하셨다. 내가 감옥에 들어간 충격으로 지병인 심장병이 재발했던 것이다.


“공부는 하느냐?”
“기도는 하느냐?”
“성경은 읽느냐?”


어머니는 나를 보자 연거푸 질문을 하셨다. 나는 얼떨결에 “네, 네, 네”하고 대답했다. 물론 어머니는 내가 공부도 기도도 성경 읽기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리라. ‘감옥에 있더라도 공부해라, 기도해라, 성경 읽어라’는 말씀을 돌려 하신 것이다.


“나는 네가 보통 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몹시 대견하구나. 네 스스로 옳다고 믿는 대로 당당하게 행동해라.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어머니는 그 말씀을 끝으로 일어나셨다. 면회시간 3분 중에서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간수가 어머니께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대로 면회실을 나가셨다.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어렵게 자식들을 키우면서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셨다. 항상 꿋꿋하셨다. 어머니께서 우리가 보지않는 곳에서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는 사실을 나는 철이 들어서야 알게 됐다.


그날도 어머니는 “고생 많지? 힘들지?”라고 말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하지만 혹여 자식에게 눈물을 보이게 될까 봐 당신이 할 말만 하고 가신 것이다. 아마도 형무소를 나가자마자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풀려난 직후인 그해 12월 15일 세상을 떠나셨다. 내 구속으로 재발한 심장병이 악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나는 큰 불효를 저질렀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여온다.


감옥에서 내게 주어진 것은 시간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뵙고 난 뒤 많은 생각을 했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고 감옥에 갔다 온 학생들은 대부분 정치권에 투신했다. 그러나 학생운동을 정치인이 되기 위한 ‘경력 쌓기’로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대학 입학은 현실에 의한 선택이었다. 어려서부터 냉엄한 사회 현실에 발을 들여놓은 결과였다. 가난이란 단순히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영혼을 파괴할 수도 있었다. 그 쓰라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당시 가난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논밭 팔아 마련한 학비로 대학을 졸업해도 갈 곳이 없었다. 온 국민이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이었다. 나를 구하고 가족을 구하고 민족을 구하는 길은 무엇인가? 나는 감옥에서 묻고 또 물었다. 그러고는 정계보다는 재계로 가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

  • facebook
  • twitter
댓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