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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의 헌책방이명박 | 2015.11.30 | N0.5

청계천의 헌책방


‘대학 입학시험이라도 한번 쳐보자. 일단 합격하면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대학 중퇴가 되지 않을까?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취직하기도 쉽겠지?’


마음을 굳힌 나는 서울대에 다니는 중학교 동기생을 찾아갔다.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조언을 얻고, 교과서와 참고서도 빌려볼까 해서였다.


“야간고등학교를 나와서 어떻게 대학을 가냐? 설령 합격한다 해도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하고? 괜히 헛고생하지 말고 포기해라.”


어찌 보면 현실적인 충고였지만 그때는 야속하고 서러웠다. 그 집을 나오면서 느꼈던 비참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물론 참고서도 빌리지 못했다. 나중에 사회에서 이 친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정작 자신은 그때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친구에게 퇴짜 맞은 나는 그 길로 청계천 헌책방을 찾아갔다. 40대 남자인 책방 주인이 어떤 책을 찾느냐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데 어떤 책을 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야간 상고를 졸업한 나는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어떤 책을 봐야 하는지도 몰랐다. 책방 주인은 한심한 듯 나를 쳐다보더니 대충 책 몇 권을 골라줬다. 그러나 주인이 골라준 책값을 치르기에는 내가 가져간 돈이 한참 모자랐다. 돈이 부족하다고 하자 주인은 불같이 화를 냈다.


“바쁜 사람 놓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거 참 엉뚱한 놈이네!”


나는 책방 주인의 기세에 눌려 자초지종을 털어놨다. 대학시험을 한번 쳐보고 싶은데, 합격해도 다닐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책방주인은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듣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다시 책을 골라 내 앞에 쌓아놓았다.


“이 책들로 공부하면 시험은 칠 수 있을 거다. 있는 돈만 주고 가져가. 그리고 등록금은 지금 걱정하지 마라. 다니고 안 다니고는 합격한 후에 고민할 일이야. 지금은 합격할 생각만 하면 되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의 뿌연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나는 시험도 치기 전부터 합격한 후의 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친구의 현실적인 충고에 포기하려고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하기도 전에 희망이 없다며 지레 포기한다. 하지만 나는 도전하는 자만이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걸 그 때 배웠다. 청계천 헌책방 주인이 내게 해준 말은 이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시장 사람들의 도움으로 대학에 진학하다


어렵게 참고서를 구했지만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나는 낮에는 일당 노동자로 일하고 밤에는 ‘잠 안 오는 약’을 먹어가며 공부했다. 일당 노동자 합숙소 구석에서 작은 불을 켜고 공부하다가 다른 노동자들에게 “불 끄고 잠 좀 자자”는 호통을 듣는 일이 다반사였다.


무엇보다도 몸이 견뎌내질 못했다. 시험을 사흘 앞두고 결국 몸져누웠다. 시험 당일에는 휘청거리는 몸을 이끌고 겨우 시험장에 들어갔다. 합격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도 대학시험을 보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그런데 결과는 뜻밖이었다. 고려대 상대 경영학과에 합격한 것이다. 합격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이태원 시장에 계신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렇듯 사과상자 위에 생선 몇 토막을 올려놓고 장사를 하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 귀에 대고 말했다.


“어머니, 저 대학시험에 합격했어요.”


“어 그래. 누군데? 참 잘됐다.”


어머니는 설마 내가 대학에 합격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셨다. 남의 이야기인 줄 알고 대답하신 것이다.


“저예요, 저. 제가 대학시험에 합격했다고요.”


어머니는 깜짝 놀라셨다. 중학교만 졸업하고 마는 줄 알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야간 상고에 간 자식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도 일당노동자로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대학에 합격했다니 믿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이냐? 네가 어떻게 시험을 쳤냐? 어떻게 공부해서 합격했냐?”


어머니는 기쁨에 들떠 물으셨다. 내가 어떤 학교, 어떤 학과에 합격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대학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랍고 감격스러워하셨다. 그러다 이내 얼굴빛이 어두워지셨다. 당장 우리 형편을 생각하셨다. 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부터 걱정되셨을 것이다. 그때 어머니의 표정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네가 어쩌려고 그런 일을 저질렀노…….”


“다닐 생각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시험만 한번 쳐본 거예요.”


나는 그렇게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쏜살같이 돌아왔다. 시험에 합격해도 등록금을 내지 않으면 대학 중퇴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알았다. 고민하던 차에 어머니가 급히 찾으셔서 이태원 시장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얘야. 시장 사람들이 네게 일자리를 주고 입학금과 한 학기 등록금을 선불로 주신단다.”


일자리는 새벽에 시장을 청소하고 쓰레기를 갖다 버리는 일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환경미화원이다.


시장 상인들이 그런 결정을 한 데는 어머니에 대한 신뢰가 큰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생선가게 앞에서 좌판을 깔고 생선 장사를 하셨다. 그것이 미안하고 고마워 장사가 빨리 끝나면 손수 그 주변을 모두 청소하셨다. 생선가게 앞에서 생선 좌판을 벌일 수 있게 해준 고마움에 보답하는 길은 그것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런 사실이 소문나면서 시장 상인들은 어머니가 어떤 성품을 지닌 분인지 알게 됐다. 그런 어머니의 아들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내게 일자리를 주고 등록금도 선불로 준 것이다.


그렇게 나는 대학에 입학했다. 이른 새벽, 시장이 열리기도 전에 리어카에 쓰레기를 산더미같이 실어 나르는 일은 매우 고됐다. 하지만 그 일 덕분에 나는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중학교 선생님과 청계천 헌책방 주인 그리고 이태원 시장 상인들의 도움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분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다. 그분들은 부자가 아니었다. 금전적으로 내게 큰 도움을 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내가 가난을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여학교 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며 야간 상고를 다닌 가난한 소년이 대기업 회장이 되고, 서울시장을 거쳐 대통령이 됐다. 그 이면에는 평범한 이웃들의 고마운 도움이 있었다. 누구나 인생의 고비마다 그런 고마운 분들을 만나는 것은 아닐 터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나는 그 누군가가 바로 국가라고 생각한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서울시장 재직 시절 ‘하이서울 장학금’을 신설하고 대통령 취임 후 ‘든든학자금’을 만든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거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세 차례의 도움은 대통령이 되어 국정을 수행하는 데도 여러 가지로 좋은 교훈이 됐다. 올바른 복지는 내가 받은 세 차례의 도움처럼 새로운 삶을 열어갈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그러나 잘못된 복지는 거지 친구의 이야기처럼 가난에 안주하게 할 위험이 있다.


선거 때 선심성 복지정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면 더 많은 표를 얻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책임질 수 없는 공약을 내걸지 않으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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