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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 바지를 얻어 입고 싶었던 소년이명박 | 2015.11.23 | N0.2

1장 나는 대통령을 꿈꾸지 않았다


1 가난과 어머니


“나는 미국에 빚진 게 없습니다”


2009년 11월 19일, 청와대는 막바지 단풍에 물들어 있었다. 취임 후 한국을 처음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청와대 상춘재에 마련된 오찬장에 마주앉았다. 상춘재는 건평 110평 남짓 되는 목조 한옥 건물로, 주로 귀빈들과 식사나 간담회를 할 때 사용하는 장소다. 장시간의 긴장된 정상회담을 마친 후였다.


민주당 출신의 젊은 대통령인 오바마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한·미 FTA 체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2008년 미국 대선 과정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전미자동차노조(UAW)의 입장을 받아들여 한·미 FTA 체결에 반대해왔다. 부시 행정부와 공화당의 부단한 설득과 노력에도 오바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공화당 출신 조지 부시 대통령과 친했다는 이유로, 한국 언론들은 민주당 출신 오바마 대통령과 갈등을 빚을 것이라 예측하고 있었다. 임기 1년을 남겨둔 부시 행정부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한 것은 외교적 오판이라는 비판까지 일고 있었다.


당연히 오바마와의 정상회담은 난항이 예상됐다. 한·미 FTA 체결도 물 건너갔다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3장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당초 30분으로 예정된 단독 회담을 70여 분으로 연장하며 논의를 거듭했다. 쉽지 않은 회담이었다.


오랜 논의 끝에 결국 오바마는 생각을 바꿨다. 한·미 FTA의 필요성을 재인식하게 됐으며, 북핵 문제와 세계 금융위기 극복 방안 등에 대해서도 공감대를 형성했다. 무엇보다도 향후 한·미 관계를 좌우할 양국 정상 간 신뢰를 쌓았다는 점에서 이날 회담은 큰 의미가 있었다.


전날까지 쌀쌀하더니 날씨가 한결 포근해졌다. 식탁에는 비빔밥과 불고기 등 한식이 차려졌다. 오바마도 힘든 회담을 무사히 마쳤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오찬장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나는 50여 년 전 내가 겪었던 일화를 들려준 후 오바마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나는 개인적으로는 미국에 빚진 게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오바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헌 바지를 얻어 입고 싶었던 소년

내가 오바마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 원조를 받던 가난한 나라였다. 전쟁으로 아버지가 실직하시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술지게미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허다했다. 술지게미는 술을 빚고 남은 찌꺼기를 말한다. 당시 가난한 집에서는 술지게미를 끓여 밥을 대신하곤 했다. 우리 가족은 술지게미 중에서도 가장 싼 것을 사다 끓여 먹었다.


부모님은 시장 행상을 하셨다. 나도 부모님을 도와 장사를 했다. 내 옷은 늘 남루했다. 다 해어져 무릎에 이중삼중으로 덧댄 누더기 바지를 입고 다녔다. 나라 사정이나 집안 사정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시절이었다.


하루는 방과 후에 학교 운동장에서 미국 여자 선교사가 큰 상자에 든 옷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미국에서 모아온 헌옷이었다. 요즘 우리가 아프리카를 비롯한 가난한 나라를 돕기 위해 헌옷을 모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도 기운 자국 없는 깨끗한 바지를 한 벌 얻어 입고 싶어 줄을섰다.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나는 부끄러움에 차마 앞에 서지 못했다. 맨 뒤에 섰더니 내 차례가 되기도 전에 옷은 동났다. 허탈한 마음에 한동안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해가 지는 운동장에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괜히 줄을 서서 기다렸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어린 마음에 자존심도 많이 상했다. 그날 이후 나는 미국 선교사들이 구호물품을 나눠줄 때, 다시는 줄을 서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미국에 빚진 것이 없다’는 말은 그러한 의미였다. 오바마가 그 말에 유쾌하게 동의한 것이다. 이어서 나는 오바마에게 말했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은 미국이 지켜준 자유민주주의로 인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3만 7,000명의 미국 젊은이들이 한국 땅에서 희생됐죠. 그렇게 지킨 나라가 이렇게 발전했습니다.”


오바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 중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가 바로 한국입니다. 그러니 미국은 우리의 성공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됩니다.”


미국이 작은 이해관계를 따져 한국을 견제할 게 아니라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미국 민주당 의원들이 우리 기업을 견제해 한·미 FTA를 반대하고 있었다. 나는 오바마에게 한·미 FTA가 조속히 처리될 수 있도록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오바마가 대답했다.


“나는 오늘 우리 대화에서 의회를 설득할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을 찾았습니다. 돌아가면 의원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할 것입니다.”


이후 오바마의 적극적인 조치로 2년 뒤인 2011년 10월 한·미 FTA 이행법안이 미 의회를 통과하기에 이르렀다.


오바마는 1961년생으로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다. ‘헌 바지 일화’는 그런 오바마가 한국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감회가 새로웠다.


사실 이날 차마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 6·25 전쟁이 터지고 우리 가족은 포항 흥해의 큰아버지 집으로 피신했다. 그해 여름 어느 날 아침, 내 바로 위 누이가 막냇동생을 업고 마당에 있을 때였다.


‘쌕쌕이(당시 미군 전투기를 이렇게 불렀다)’가 머리 위로 지나가더니 요란한 폭음이 들렸다. 폭격이 멈춘 후, 정신을 차리고 마당으로 뛰어나간 가족들은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누이와 동생을 발견했다.


전쟁으로 약을 구할 수 없던 시절이라 어머니는 산에서 캐온 쑥이나 약초를 찧어서 누이와 동생의 온몸에 바르셨다.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누이와 동생은 고통에 시달리다 결국 두 달 후쯤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나는 미국에 빚진 게 없을 뿐더러, 가족사로 보면 오히려 미국의 피해자인 셈이다.


한국은 2010년 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회원국이 됐다. 전후 독립한 국가 중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가 된 것은 한국이 최초였다. 2010년에는 세계 7대 수출대국으로 성장하고, 2011년에는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무역 1조 달러를 달성했다.


미국 선교사가 나눠주는 헌 바지 한 벌 얻어 입으려고 줄을 섰던 부끄럼 많은 소년이 이제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통상대국의 대통령이 된 것이다. 나 개인으로서도 큰 보람이지만 우리 국민에게도 큰 자랑이라 생각된다.


오바마를 배웅하며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격동의 우리 역사만큼이나 치열한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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