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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하자이명박 | 2018.03.16 | N0.168
39. 109번의 라디오 연설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하자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요즘 참 힘드시죠? 저 역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2008년 10월 13일, 나는 청와대에 마련된 마이크 앞에 앉았다. 제1차 라디오 연설을 하기 위해서였다. 과거 노태우 대통령도 1989년 6월부터 9월까지 열다섯 차례 라디오 연설을 했다.

대통령의 라디오 연설로 가장 유명했던 것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노변담화(爐邊談話, Fireside Chat)’다. 루스벨트는 1933년 세계경제 대공황 속에서 수시로 라디오를 통해 국민과 소통해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라디오 연설을 시작할 때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취임 초 터진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사태로 소통 문제가 대두됐다. 정부의 소통 부재가 광우병 사태를 낳았다는 비판도 있었고, 정부가 국민과 소통에 나서야 한다는 조언도 있었다.

그러나 국민과의 소통에 가장 목이 말랐던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그때만 해도 대통령과 정부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그 의미가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전달되기 힘들었다. 앞뒤가 잘려 본의 아닌 표현으로 왜곡되어 전달되는 경우가 많았다.

만일 그 같은 오해와 비판으로 인해 내 개인이 정치적 타격을 입는 데 그쳤다면, 라디오 연설까지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당시 문제는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2008년 9월 전대미문의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한국은 제2의 외환위기를 겪을 상황에 처해 있었다. 온 국민이 우리 경제에 대한 자신감과 신뢰로 똘똘 뭉쳐 헤쳐나가더라도 극복하기가 절대 쉽지 않은 위기였다.

그러나 사태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흘러갔다. 앞서 2장에서 설명했지만 광우병 사태 이후 인터넷을 통해 번진 ‘9월 위기설’ 때문이었다. 우리 경제에 대한 과장된 불신과 오해는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갔다. 외신마저도 이에 합세해 연일 한국경제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놨다. 그로 인해 우리 은행들은 돈줄이 막혀 하루 자금으로 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청와대와 각 부처는 언론의 이 같은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정부가 어떤 말을 하든 색깔이 덧칠해져 왜곡되어 전달되기 일쑤였다. 이대로라면 한국이 제2의 외환위기를 맞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고민 끝에 라디오 연설을 결심하게 된 것은 그 같은 생각에서였다.




위대한 국민의 부름 받은 5년, “영광이었습니다”

첫 연설의 주제도 당연히 경제문제였다. “기업과 금융기관의 체질도 몰라보게 튼튼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던 경험과 자신감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고, 대한민국의 미래는 여전히 밝습니다.”

나는 1차 연설에서 우리 국민들이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북돋아주고자 했다. 그러나 1차 연설이 나가자 야권은 일제히 반발에 나섰다. “염치없고 뻔뻔하다”는 원색적인 비난부터, 야당에도 반론권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야당을 비판하는 내용이 아닌, 우리 경제에 대해 자신감을 갖자는 연설에 무슨 반론권이 필요한지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결국 여야 대표들도 라디오 연설을 하는 것으로 논란은 마무리됐다. 라디오 연설은 임기 말까지 4년 5개월간 109번 방송됐다. 격주로 월요일에 거의 빠짐없이 방송된 셈이다. 매 회마다 약 7분간 대통령으로서 국정의 거의 모든 분야와 현안에 대해 국민에게 직접 자세히 설명하고자 했다.

그러다 보니 라디오 연설로 인해 가장 많은 고생을 한 것은 연설기록비서관실이었다. 김영수 연설기록비서관은 후일 방송에 출연해라디오 연설로 인한 고초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점호만 없으면 군대생활도 할 만하다고 하는데, 라디오 연설만 없어도 연설비서관은 할 만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없는 집에 제사 돌아오듯, 2주가 너무 빨리 돌아왔습니다.”

김 비서관은 정용화 비서관에 이어 청와대에 들어와 가장 고되다는 연설기록비서관직을 수행했다. 각종 행사는 물론 해외 순방마다 수행하며 연설문을 챙겼고, 2주마다 돌아오는 라디오 연설까지 도맡아 임기 끝까지 잘 견디며 맡은 바 역할을 잘 수행해주었다. 그 같은 노고를 나는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연설기록비서관실에서 연설 원고 초안이 작성되면, 관계자들이 모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많은 이야기를 듣고 반영하고자 했다. 그 시스템은 지금 이 회고록을 쓸 때도 그대로 적용됐다.

109번의 라디오 연설 중 가장 많은 분야를 차지했던 것은 경제문제였다. 두 차례의 세계경제위기 극복 과정에서 국민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노력이었다. 경제, 일자리, 복지 등의 키워드가 주로 등장한 것은 그 같은 이유였다.

이외에도 관광, 녹색성장, 에너지, 소셜미디어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특히 다문화가정에 대해 이야기했던 내용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작년 10월 캄보디아를 방문했을 때 훈 센 총리는 저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습니다. 한국에 사는 캄보디아 출신 결혼 이주 여성들에 대해 ‘대통령님의 며느리와 같이 생각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그동안 다문화가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정책을 수립해왔지만, ‘과연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내 며느리라고 생각하면서 세심한 애정을 담았던가’ 저는 돌이켜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기억에 남는 것은 2010년 3월 발생한 천안함 폭침과 관련한 연설이었다. 2010년 4월 19일, 제39차 라디오 연설에서 나는 46명의 천안함 전사자 이름을 불렀다. 이름을 부르는 동안 어느새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대통령의 호명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관등성명을 대면서 우렁차게 복창하는 소리가 제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여러분이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를 생각하고 가족을 걱정하며 서로 ‘너만은 살아남아라’고 격려했을 그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런던 올림픽 때, 우리 선수들의 드라마 같은 승리를 전하는 순간에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제 새벽에, 여러분, 축구 다 보셨죠? 종주국 영국 선수들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정말 가슴 벅찼습니다. 우리 한국의 젊은 선수들, 정말 대단했습니다.”

2013년 2월, 나는 마지막 라디오 연설을 청와대 참모진과 준비했다. 하금렬 대통령실장을 비롯해 어청수 경호처장, 김대기 정책실장, 정진영 민정수석, 천영우 외교안보수석, 이달곤 정무수석, 최금락 홍보수석, 박범훈 교육문화수석, 노연홍 고용복지수석, 박인주 사회통합수석, 안광찬 국가위기관리실장, 김명식 인사기획관, 장다사로 총무기획관, 이동우 기획관리실장, 유명희 미래전략기획관, 김상협 녹색성장기획관 등 임기 마지막을 안정되게 마무리하는 데 크게 기여한 말기 참모진에 대해서도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사실 한 정권이 끝나는 시기에 마지막 참모진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명박 정부 임기 5년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시기에 어떤 사람을 대통령실장으로 임명하느냐도 큰 고민이었다. 나는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두루 통합하고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SBS 상임고문으로 있던 하금렬 씨를 대통령실장으로 임명한 것은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하 실장은 조용하고 온화한 가운데 맡은 바 역할을 잘해냈고 후일 적절한 인사로 평가 받았다.

2013년 2월 18일 마지막 라디오 연설에서 나는 지난 5년을 되돌아봤다. “라디오 연설을 처음 시작한 것은 2008년 가을, 세계 금융위기를 맞았을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가운데 라디오를 통해 국민에게 위로와 격려를 드리고, 용기를 북돋아드리고 싶었습니다.

지난 5년간 국민 여러분께서 성원해주시고 다함께 힘을 모아주신 덕분에 우리는 전대미문의 글로벌 경제위기를 세계에서 가장 잘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세계가 다 후퇴할 때 오히려 대한민국의 국가 신용등급은 사상 최고로 높아졌고, 세계 7대 무역 강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임기 첫해,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가 떠올랐다. 참 어려운 시기였지만, 그래도 온 국민이 힘을 모아 세계경제위기를 다른 나라에 비해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국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지난 5년간 국민을 위해 매 순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기에 후회나 아쉬움은 없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가장 행복한 일꾼’이었습니다.”

마지막 연설을 하면서 대한민국의 힘찬 전진은 계속될 것이라 확신했다.




<후기> 열정은 길을 잃지 않는다

회고록 마지막 부분의 검토를 마치고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나니 이제야 대통령으로서 소임을 다한 기분이다. 2013년 2월 24일 청와대를 떠나 서울 논현동 사저로 돌아와 보낸 첫날 밤이 새삼 떠오른다. 2002년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떠났으니 11년 만에 ‘내가 살던 내 집’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나라로부터의 부름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뿌듯했다. 아쉬움도 없지 않았지만 아무튼 홀가분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시간에 쫓기지 않는 여유와 자유가 주어졌지만 내게는 아직 낯설다. 그런 중에 오래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과 만나 생활 주변의 대화를 나누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또 다른 행복이다. 재임 5년의 정리는 시급한 과제였다. 그것은 교훈일 수도 있고 반면교사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임기를 마치면서 13권으로 된 <이명박정부 국정 백서>를 발간했으나 그것은 정부의 공식 기록이다.

나의 대통령 경험을 ‘내 목소리로’ 기록하여 남기는 작업은 또 다른 차원의 임무이기도 했다. 기억이 용탈되어 희미해지기 전에 대통령과 참모들이 생각하고 일한 기록을 가급적 생생하고 또렷하게 남기고 싶었다. 2013년 5월 회의체가 구성됐다. ‘이명박 정부 5년 돌아보기’가 시작됐다. 물론 나의 회고록이니, 나는 매번 참석했다. 김두우 홍보수석(이하 직명은 재임 당시의 전직)이 총괄 집필을 맡았다. 김 수석이 회의 참석자를 선별해 통보하고 주제를 정해 회의를 진행했다.

박용석 작가는 초고를 작성하고 회의에서 나온 의견을 종합해 반영했다. 그 원고는 류우익 초대 대통령실장과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박형준 정무수석, 김태효 대외전략기획관 등이 부문별로 맡아 감수했고, 이를 김 수석이 다시 최종 검토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손봤다.

회의는 류우익 실장을 중심으로 이달곤·김효재 정무수석과 이동관 홍보수석이 고정 멤버로 참석했다. 정정길·하금렬 대통령실장도 종종 나와서 거들었다. 외교안보와 대북 관계 회의에는 유명환·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현인택 통일부 장관과 천영우 외교안보수석, 김태효 대외전략기획관 그리고 경제정책은 강만수·윤증현·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과 백용호·김대기 정책실장, 박병원 경제수석이 참석해 자료를 복원하고 토론을 거듭했다. 교육문화 분야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과 박범훈 교육문화수석, 유명희 미래전략기획관이 기억을 되살리고 경험을 공유했다.

주제별 회의도 열었다. ‘4대강 살리기’를 다룰 때엔 정종환·권도엽 국토해양부 장관과 이동우 기획관리실장, 녹색성장과 관련해서는 김상협 녹색성장기획관이 수시로 회의에 참석했다. 재임 중 매 행사마다 참석했던 김영수 연설기록비서관과 박정하 대변인도 기억을 보탰다.

회의에는 이진영·김윤경 국장이 배석해 기록을 찾아내고 자료를 보완했다. 그 밖에도 많은 장·차관, 수석들과 관련 인사들이 수시로 연락하면서 증언하고 기억을 더했다. 2013년 말과 2014년 여름에는 두 차례에 걸쳐 집중 작업을 위한 워크숍도 가졌다. 20여 명의 전직 고위 공직자들이 꼬박 며칠씩 묵으면서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다.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헌신적인 노력이 보태지지 않았으면 이렇게 빨리 회고록이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회의는 서울 삼성동에 있는 내 사무실에서 매주 화요일(초기에는 월요일) 오전 8시에 샌드위치나 김밥에 커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고 시작해 점심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이어졌다. 매번 열 명 이상이 1년 6개월 동안 매주 모였다.

회의 분위기는 뜨거웠다. 먼저 우리가 수행했던 정책이 테이블에 오르면 담당 장관이나 수석이 정책의 입안 단계에서부터 성안을 거쳐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지 정책 개요와 과정을 기록과 기억으로 설명했다. 이어서 왜 그런 결정을 했고, 어떻게 그런 결정에 이르게 됐는지 등 배경을 되살린 다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정리하는 순으로 이어졌다. 당연히 내게 질문이 쏟아졌고 수정과 반론도 나왔다. 내가 자세히 몰랐던 사실들이 드러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화자찬을 경계했다. 지난 일을 되돌아보다 보면 굳이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있고 내 입으로 말하기 거북한 일도 있다. 특히 의도하지 않더라도 내가 한 일들이 미화되거나 과장되어 기억될 위험이 있다. 국정 철학을 공유하면서 함께 일했고 따라서 이해관계가 겹치는 참모들과 과거사를 돌아보다 보면 스스로 집단적 자아도취에 빠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기우였다. 얘기가 한곳으로 흐른다 싶으면 참석자 가운데 누군가는 제동을 걸었다. 거의 예외가 없었다. 지금 얘기하는 사안을 다른 방향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 것인지, 대통령의 결정을 그런 방식으로 묘사했을 때 국민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등 문제를 제기했다.

어떤 때는 서운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질문은 집요했고 지적은 신랄했다. 듣기 좋은 말도 아니고 매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더러 들기도 했지만 참고 호응했다. 돌이켜보면 이들의 견제와 지적이 없었더라면 이런 기록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맙기 그지없다.

어떤 정책과 관련해서는 아직도 참모들 간의 견해가 다른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이견은 여과 없이 회의석상에서 표출됐다. 이러한 이견을 조정해 만들어진 정책들이 알차고 건실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이 우리 정부의 힘의 원천이었다는 생각에도 흔들림이 없다.

나는 어려운 일일수록 여러 사람으로부터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이 상책이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체득했다. 특히 견해가 다른 사람의 주장을 듣다 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결정을 할 것인지가 분명해지는 경우가 많았다. 참모들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내게 고맙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자신의 견해를 용기 있게 말하는 참모들이 고맙고 자랑스럽다.

회고는 반성이다. 지난 일은 언제나 부족하다. 돌이켜보면 뿌듯한 일도 많았으나 왜 좀 더 잘하지 못했던가, 그럴 기회는 없었던가 하는 아쉬움이 없을 수 없었다. 재임 5년 동안의 국정을 그 일을 직접 담당했던 참모들과 함께 되돌아보고 정리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책을 쓰면서 이런 원칙을 갖고 있었다. ‘사실에 근거할 것, 솔직할 것, 그럼으로써 후대에 실질적인 참고가 될 것.’ 이 회고록이 얼마나 이 원칙에 충실한 책이 되었는지는 독자들의 평가와 역사의 몫이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책의 내용 중에 혹시라도 개인적으로 불편을 끼친 부분이 있다면 본의가 아니었음을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이번 회고록을 쓰면서 임기 5년간 겪었던 일을 모두 다 담을 수는 없었다. 특히 현실 정치와 대북 관계 그리고 국제관계에 관련된 내용은 상당 부분 간추리거나 혹은 국익을 위해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대통령의 시간》은 내 개인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이명박 정부 5년을 함께했던 참모들과의 집단 기억이다. 다시 한 번 그 기억을 재조립하는 데 시간과 열정을 바친 참모들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그 모든 일과 기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다는 점도 분명히 해둔다.

민간기업 현대에서 일한 후 국회의원, 서울특별시장,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공무를 맡아 임기를 마쳤다. 이제 자랑스러운 나라, 대한민국의 전직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사회로부터 배운 것, 얻은 것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일을 하고 싶다. 그러는 중에 오랜 취미인 테니스와 뒤늦게 배우기 시작한 서예에 시간을 낼 수 있으면 좋겠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 곳곳을 다녀볼 계획도 갖고 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애써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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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리스트
  • 이충웅 2018-03-16 12:37:08

    1.  모짜르트/교향곡 제40번 g단조 K.550
    1,Molto alleg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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