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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만의 농협 개혁이명박 | 2018.03.09 | N0.165
17년 만의 농협 개혁

2008년 12월 4일 새벽,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을 방문했다. 김장철 막바지인데 배춧값이 너무 떨어져 농민들은 수심에 차 있었다. 산지에서 올라온 배추를 500포기 구매했지만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시장을 둘러보던 중 커피를 파는 리어카가 보였다. 농민·상인들과 리어카에 둘러서서 커피를 마시며 나는 이야기했다.

“농사짓는 분들, 빚내서 농기계 구입하잖아요? 1년에 몇 달 쓰고 농기계 한쪽에 놓아뒀다가, 내년에 다시 쓰려면 녹슬고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고치려면 또 돈 들고 빚이 늘어나고……. 그러니까 농협이 기계를 사서 때 되면 싼값에 농민들에게 빌려주고 해야 하는 거예요. 농협이 농업을 위해 온 머리를 써야 하는 거예요. 농협 간부라는 사람들이 정치한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이권에나 개입하고 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농민들은 다 죽어가는데 말이지. 농협이 정치를 하니까 안 된다 이거예요.”

농협 문제는 뿌리가 깊었다. 농협은 농민을 위해 설립된 자율 조직이다. 한국과 같은 영세 소농의 농업 현실에서 개별 농민들이 유통과 판매 사업을 직접 수행하기 어려워 농협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왔다. 그러나 농협은 금융 업무에 치중한 나머지 유통을 비롯한 경제사업에 소홀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특히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UR)가 타결되고 농산물 수입자유화가 광범위하게 추진되면서 농협개혁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농협 개혁의 핵심은 ‘신·경 분리’를 통한 농협의 경제 사업 활성화였다. 신·경 분리란 농협의 경제 사업과 신용(금융 사업) 사업을 분리하여 농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신·경 분리에 성공하면 농민은 생산에만 전념하고, 유통과 판매는 농협이 책임지는 선진화된 시스템을 구현할 수 있었다.

또한 농협의 지배구조 개혁도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다. 1988년 농협중앙회장 직선제 도입 이후 취임한 세 명의 중앙회장은 모두 권한을 남용하여 사법 처리됐다. 선거에 의해 선출된 중앙회장에게 권한이 집중됨으로써 정치적인 의사 결정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지역 및 조합원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사회 기능이 약화된 결과였다.

특히 2008년 11월, 농협중앙회 회장의 비리 사건은 이러한 지배구조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일이었다. 따라서 회장의 권력을 분산시키고 이사회의 권한을 늘려 경영의 투명성과 전문성을 높이는 일이 시급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농어촌발전위원회’를 만들어 농협 개혁에 착수했다. 그러나 기득권을 지키려는 반발과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얽히며 만족할 만한 농협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김대중 정부도 농협 개혁을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선정하고 추진했지만 신·경 분리를 추진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도 농협 개혁에 관심이 많았지만 2007년 3월 ‘농협중앙회 사업 분리방안’에서 10년 후에 농협 개혁을 완성하는 것으로 논의를 마감했다.

이처럼 농협 개혁은 김영삼-김대중-노무현 3대 정부까지 세 정부를 거치면서도 이루어지지 못한 일이다. 나는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서 농협의 이러한 문제점을 이야기한 것이다. 나는 취임 초부터 농협 개혁을 강하게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2008년 5월 초부터 광우병 사태가 발생하고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이 교체되면서 농협 개혁은 논의 자체가 중단되는 상황을 맞게 됐다.

2008년 12월,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방문을 계기로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농협 개혁 논의는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 결과 2011년 11월, 농협의 신·경 분리와 지배구조 개혁을 골자로 하는 개정 ‘농업협동조합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고, 2012년 3월 2일 새로운 농협이 출범하게 됐다.

17년간 미루어진 농협 개혁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야가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르고, 이해 당사자들도 대국적인 관점에서 협력하면서 이 같은 성과가 가능했다.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비롯하여 국회 최인기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위원장, 정해걸 법안심사소위원회 위원장 등 여야 의원들과, 최원병 농협중앙회 회장을 비롯한 지역조합장, 농민단체의 힘이 컸다.

21세기 농업은 단순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사업이 아니다. 복합문화 사업이자 지식 기반 사업으로, 농업인들의 자립의지와 도전정신 그리고 새로 거듭난 농협의 역할이 더해진다면 우리 농업의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노·사·정 대타협이 일궈낸 노동법 개정

노사문제는 법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노사가 자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19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우리의 노사 관계는 정치권이나 민간단체 등 외부의 힘에 의존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 결과 대립적이고 갈등적인 면이 부각되며, 법보다 힘을 중요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특히 대기업과 정규직 위주의 강성 노동운동은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을 초래했으며, 노동시장을 경직화시켜 경제성장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2009년 한국의 노사 관계 생산성은 전 세계 57개국 중 56위로 2003년 이래 7년 연속 세계 최하위권으로 평가됐다. 이 같은 연구 결과의 이면에는 이같이 사회 통합과 경제성장을 가로막는 그릇된 노사 관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노조 전임자 급여의 사측 부담과 복수 노조를 금지하는 노동법상 제도와 관행이 불합리한 노사 관계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회사 일은 하지 않고 노동조합 일만 하는 노조 전임자의 급여는 노조 자체적으로 부담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보편적 관행이다. 또한 복수 노조 금지는 노조 설립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에 위배될 뿐 아니라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에도 위배되는 일이다.

ILO가 1993년 이래 지속적으로 한국의 노동관계법 개선을 요구해온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였다. OECD 역시 1996년 이후 지속적으로 한국의 노사관계법을 모니터링하면서 개선을 요구해왔다. 1997년 3월 10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 제정된 것도 그 같은 대내외적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이 법에는 사용자가 노조 전임자의 급여를 지급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과 복수 노조를 허용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노사의 입장차가 커 전임자 급여 지급과 복수 노조 허용문제의 시행은 5년간 유예됐다. 이후 김대중 정부는 노조법 개정안을 만들어 1999년 12월 국회에 제출했으나 논의되지 못한 채 폐기됐고, 2000년에는 준비 기간이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다시 5년간 유예됐다.

노무현 정부 역시 2007년 시행을 목표로 준비했으나 노사의 입장 차이로 전임자 급여 지급, 복수 노조 문제 해결을 다시 3년간 유예하기로 결정했다. 이처럼 전임자 급여 지급과 복수 노조 문제는 1997년 입법 후 세 차례에 걸쳐 연기되어온 오랜 숙원이었다.

나는 취임 초부터 이 문제를 꼭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투쟁과 대립’의 노사 문화를 ‘상생과 협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노사 관계의 선진화가 무엇보다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2008년 9월, 이영희 노동부 장관이 나서서 경제단체 대표와 한국노총 위원장, 추미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설득 작업을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우리 정부의 노조법 개정 작업이 시작됐다. 이후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국노총의 노사정위원회 탈퇴 등 난항을 거듭한 끝에 2009년 12월 4일, 한국노총과 한국경영자총협회, 노동부 등 노·사·정 3자는 대타협을 통해 역사적인 ‘12·4 노사정합의’를 이끌어냈다.

당시 합의를 앞두고 한국노총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반영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전국 규모의 총파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석춘 한국노총 위원장이 결단을 내려 극적인 합의를 일구었다. 장 위원장은 “경제위기가 아직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고 세종시 문제 등으로 사회적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한국노총이 총파업에 돌입할 수는 없었다”며 조합원들에게 합의의 취지를 밝히기도 했다. 우리가 세계 금융위기를 큰 고통 없이 모범적으로 극복했던 이면에는 이 같은 노조의 협조가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2009년 9월 취임한 임태희 노동부 장관의 노고도 컸다. 3선 중진 국회의원 출신인 임 장관은 특유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지역별 노사간담회 등 현장과의 소통을 통해 제도 개혁을 위한 공감대 형성에 주력했다. 또한 노사정 회의가 막바지에 이른 2009년 11월 30일에는 밤샘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국회 입법 과정도 짧지만 험난했다. 12·4 노사정 합의를 바탕으로 한나라당은 12월 8일 노동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야당의 반발로 개정안 국회 통과는 결코 쉽지 않았지만, 12월 29일 추미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과 임태희 장관, 차명진 법안심사소위원회 위원장, 세 사람이 회동하여 극적인 조율을 일구어냈다.

이를 바탕으로 근로시간면제제도는 2010년 7월 1일부터,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제도는 2011년 7월 1일부터 시행하는 노동법 개정안이 2010년 1월 1일 새벽 2시 10분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게 됐다. 앞서 세 정부에서 세 차례나 유예되면서 13년간 끌어왔던 노동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한국은 ILO 이사국으로서 그리고 OECD 회원국과 G20 정상회의 개최국이라는 국격에 걸맞게 ‘노동 후진국’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국제사회에서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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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충웅 2018-03-09 14: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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