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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새로운 출범이명박 | 2018.03.07 | N0.164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새로운 출범

과거 우리는 일본의 전자제품에 매료되었던 시기가 있었다. 1970~80년대, 일제 카세트플레이어는 아이들에게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었다.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사람들의 손에는 일제 가전제품이 바리바리 들려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판도가 바뀌었다. 소프트웨어, 의약품, 신소재 등 몇몇 분야를 제외하면, 한국 기업들이 생산한 제품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며 외면한 일을 땀과 열정의 리더십으로 일구어낸 성과였다.

그러나 이는 곧 새로운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선진국의 기술을 모방하여 추격해오던 연구개발 전략으로는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 경제강국이 되려면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다. 선진국이 아직 시도한 바 없는 분야를 선점하여 미래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창조형 연구개발을 추진하여 이를 비즈니스와 연결시키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의 과학기술 역량을 결집하여 부처와 연구기관 간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일이 중요했다. 그러나 취임 초, 과학기술계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뿌리 깊은 불신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당시 과학기술계는 종전의 과학기술부가 교육부와 통합하여 교육과학기술부가 된 것에 상당히 실망하고 있었다. 중장기적인 정책 이슈인 과학기술 의제가 교육 현안에 밀리고 있다는 피해의식에서 비롯된 실망감이었다.

반면 산업계에서는 우리의 경제 규모에 비해 과학기술 투자가 결코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연구개발 성과가 낮다는 비판이 있었다. 또한 연구 현장의 건전한 문화 정착과 더불어 연구비 집행에 대한 도덕적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오고 있었다. 신뢰 회복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시스템을 개혁하여 거시적인 틀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정부 연구개발 투자비의 약 25퍼센트를 사용하는 정부출연연구소에 대한 발전 방안을 마련하는 일도 시급했다. 그러나 정부출연연구소 개혁은 역대 정부들이 해결하지 못한 어려운 문제였다.

나는 박재완 국정기획수석에게 이에 대한 방안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2009년 11월, 과거 삼성전자 부회장이었고 당시 한국공학한림원 회장직을 맡고 있던 윤종용 씨를 위원장으로 하는 민간위원회가 구성되어 이 문제를 검토했다.

2010년 7월, 민간위원회의 보고를 받은 후, 나는 새로운 국가 과학기술 시스템과 정부출연연구소의 발전을 추진할 청와대 조직으로 미래전략기획관실을 설치했다. 미래전략기획관으로는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유명희 박사를 임명했다.

“연구개발비 배분에서도 국정의 다른 부분처럼 부처 이기주의가 횡횡하고, 또 과학계에 계파가 있는 것 같아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과학기술 투자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심하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어요.” 나는 유 기획관을 임명하면서 내 심정을 전했다. 일주일 정도 지난 후 유 기획관은 “과학기술 시스템을 먼저 개혁한 후 정부출연연구소 선진화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했다. 두 가지 난제를 한꺼번에 처리하려다 보면 둘 다 성공하기 어렵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유 기획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과학기술 시스템 개혁의 첫 번째 과제는 민간 위원회가 제안한 안을 바탕으로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위상과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비상설 자문기구로서 정책과 자원 배분을 종합 조정하고 집행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2010년 10월 1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상 및 기능 강화 방안이 확정됐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상설화하여 기능을 강화시키고, 위원장을 대통령이 맡는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법조계와 행정학계 일부에서 “대통령이 상설 행정위원회의 위원장을 겸직하는 것은 우리 헌정 사상 처음 있는 일이며 문제가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그로 인해 이해관계자들 사이에 법리적 시비까지 오가고 있었다.

나는 이 같은 상황이 오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결국 11월 15일,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수정안을 마련하여 장관급위원장으로 결말을 지었다. 2010년 12월 8일 과학기술기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12월 27일 공포됨에 따라, 2011년 3월 28일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새롭게 출범했다. 초대 위원장은 김도연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맡았다.

2011년 4월 7일 개최된 제1회 국가과학기술위원회에서 나는 “융합시대를 맞아 부처 이기주의를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합심해 일해달라”고 당부했다. 두 차례의 세계경제위기 속에서도 우리 정부가 연구개발 투자를 매년 10퍼센트 전후로 증가시킨 결과, 이제 GDP 대비 투자율이 세계 2위 수준에 이르렀다.

연구개발 투자는 대통령 임기 중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없어 간혹 소홀히 되기 쉽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 때 연구개발 투자는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중요한 일이다. 새로운 분야의 미래 원천기술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우리 경제의 성장은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2장 아쉬움을 뒤로하고
38. 한 일과 못다 한 일들

전봇대 뽑기

“지난 대선 때, 목포에 있는 대불공단을 방문했어요. 선박 블록 제조회사들이 길가의 전봇대 때문에 선박 블록 운반에 지장이 많다며 관계기관에 전봇대를 옮겨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록 잘 안 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 지금도 안 되었을 거예요.”

2008년 1월 18일, 인수위원회 첫 간사단 회의에서 나는 대선 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새 정부의 정부부처 조정에 따른 업무 효율 향상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 말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내 뜻과는 다르게 ‘전봇대 뽑기’는 우리 정부 규제 개혁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2008년 2월 25일, 제17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나는 선진화 원년을 선포했다. 2008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는 해였다. 지난 60년간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만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일구어 냈다. 그러나 민간과 시장의 기능이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계층 간, 지역 간, 세대 간의 사회적 갈등도 격화됐다. 이 같은 문제는 무한 경쟁의 세계화시대에 우리의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었다. 나는 취임 초부터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선진화 개혁을 추진했다. 선진화란 국가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개선하여 내실을 다지는 일이었다.

기억에 남는 규제 개혁성과 중 하나로 모바일의 위피(WIPI) 의무탑재 제도 폐지가 있다. 위피는 한국형 모바일 운영체제다. 2000년대 초, 통신사마다 각기 다른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데 대한 지적이 있었다. 콘텐츠 업체가 같은 콘텐츠를 여러 개의 플랫폼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모든 사업자가 공동 사용할 수 있는 ‘위피’라는 단일 표준 모바일 운영체제를 개발하여 2005년 4월부터 모든 단말기에 사용을 의무화했다.

위피 의무 탑재 제도로 인해 콘텐츠 업체의 비용은 줄었지만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아이폰을 비롯한 다른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해외 모바일의 수입이 제한되면서 우리 국민들의 소비자 권리가 침해되고, 우리 휴대전화 업체들이 국내 시장에 안주하는 경향도 커졌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우리 정부는 위피 의무 탑재를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국내 기업 모두가 반대하고 나섰지만 우리정부는 2009년 4월 1일부터 위피 의무 탑재 제도를 폐지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국내 시장으로 아이폰 등 외국의 모바일 제품이 들어오면서 삼성을 비롯한 우리 모바일 업체들은 적극적인 제품 개발에 나섰고, 그 결과 한국의 모바일 사업이 세계시장에 진출하면서 우리 경제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됐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개혁이라도 그로 인해 그동안 누리던 많은 혜택을 내려놓아야 하는 집단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들은 이익집단이 되어 강력하게 반발하며, 개혁은 인내심이 요구되는 질곡의 과정이 된다. 그 과정에서 개혁을 추진하던 정부가 정치적 타격을 입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시기가 우리의 발전 엔진에 다시 불을 붙이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선진화 개혁에 총력을 기울였다.

투자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국가 경쟁력 제고의 걸림돌로 작용했던 대기업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했다. 수도권에 대한 과도한 규제도 완화하고, 산업자본의 금융 산업에 대한 투자 제한도 완화했다. 창업 절차를 간소화하고 시장 진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여 각분야의 경쟁을 촉진시켰다. 또한 노동법 개정을 완료하여 노사 관계를 선진화했다.

전관예우 관행을 개선하고 공직자 윤리 강화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2011년 6월 14일 국무회의에서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이 ‘공정사회, 국민과 함께하는 청렴 확산방안’을 보고했다. 부패문제 해결의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반부패·청렴의식 확산을 통한 사회 전반의 신뢰를 구축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후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청탁수수 근절 대국민 토론회’ 등 활발한 토론을 거쳐 ‘부정청탁 금지법(김영란법)’이 2012년 8월 말 입법 예고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남편인 강지원 변호사가 18대 대선의 출마 입장을 밝히면서 김 위원장은 사의를 표명하여 11월 퇴임하고, 이후 공직사회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김영란법은 우리 정부임기 동안 입법화되지 못했다.

김 위원장은 김대중 정부 당시 임명된 대한민국 1호 여성 대법관으로 매우 청렴한 사람이었다. 2010년 9월 대법관 임기를 채우고 퇴임하는 김 대법관에게 나는 청조근정훈장을 수여했다. 당시 나는 김 대법관에게 퇴임 후 행보를 물었다. 김 대법관은 퇴임하면 변호사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있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대법관을 그만두면 로펌에 가거나 변호사 일을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로 인해 전관예우의 문제도 생길 때였다. 나는 김 대법관의 그 같은 생각을 높이 사 국민권익위원장으로 임명하게 됐다. 또한 공평한 병역과 납세가 이루어지도록 제도 개선에 노력을 기울였으며, 학력 차별 철폐, 비정규직 차별 개선, 대·중소기업 동반성장과 중소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추진했다. 대형유통업체와 중소 유통업체 간 상생 협력,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개선 등 공정 거래 질서도 확립코자 했다.

또한 불필요한 위원회를 대폭 정비하여 국가 경쟁력 강화를 모색했다. 농협법을 개정하여 농협의 경영 효율화를 제고하고 안전상비의약품을 약국 외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는 약사법 개정을 완료하는 등 선진화 개혁에 모든 국가적 역량을 투입했다.

우리 정부가 추진한 개혁 중에는 수십 년 묵은 과제도 있었다. 전임 정부들이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미루어왔던 일들이다. 그중에는 결실을 맺은 일도 있지만, 공공 부문 개혁이나 행정구역 개편처럼 노력은 했으나 아쉽게도 임기 중 끝내지 못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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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충웅 2018-03-08 13:55:23

    흐르는 음악 : ♬ Anything That`s Part Of You / Elvis Pres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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