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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건립이명박 | 2018.03.02 | N0.162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건립

세계가 우리의 발전을 주목하는데, 우리 스스로 과거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자신의 역사를 부정하는 국민에게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긍정과 발전의 역사관이야말로 우리를 희망찬 미래로 이끄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취임 전부터 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2008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국민에게 약속을 했다.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국민 여러분이 모두 함께 써내려간 성공의 역사였고, 발전의 역사였으며,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저는 이 역사가 기록되고 새롭게 이어질 수 있도록 현대사 박물관을 짓겠습니다.” 당시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담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일제 강점기의 항쟁의 역사를 담은 독립기념관이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기적의 신화를 만들어낸 자랑스러운 역사를 담은 시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 따라 ‘건국60주년기념사업회’가 제안한 현대사 박물관 건립을 받아들인 것이다. 2009년 4월, 건립위원회가 출범했다. 이어 5월에는 건립추진단이 발족하고, 10월에는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으로 명칭을 확정했다. 장소는 당시 문화체육관광부가 사용하고 있던 건물로 정했다.

이 건물은 1960년대 초반 미국 국제개발처(AID)의 원조를 받아 지은 건물이었다. 우리에게 기술이 없어 필리핀 회사가 와서 지어준 건물로, 대한민국 발전의 역사적 상징성이 매우 높은 건물이었다. 박물관 건립이 한창 추진 중이던 2010년 1월, 독립 선열의 후손단체인 광복회가 기자회견을 열어 건립을 반대하고 나섰다. 

대한민국 수립 시점은 1948년 8월 15일이 아닌 상해 임시정부 출범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1948년 정부 수립에 참여한 친일세력들에게 건국의 공을 돌리는 일이라며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광복회의 이 같은 주장에 진보 진영이 동조하고 나서면서, 박물관 건립은 큰 저항과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자료는 이미 독립기념관에 상세히 전시되어 있었다. 따라서 1948년 건국 이후의 역사를 담자는 취지에서 박물관 건립은 추진됐다. 우리 현대사를 무조건 미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친일 청산이 미흡했던 부분이나, 군사 쿠데타와 인권유린 등 부정적인 역사는 분명히 존재했다. 나 역시도 군사정부 시절 6·3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감옥에 갇힌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본래 명(明)과 암(暗)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도 밝은 부분만 존재하는 역사는 없다. 좋은 역사는 계승하고 나쁜 역사는 반성하며 미래의 반면교사로 삼으면 될 일이다. 어두운 부분을 부각해서 역사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우리 현대사는 세계가 놀라고 부러워하는 기적의 역사였다.

그런 관점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역사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 두고, 일제 강점기의 역사는 독립기념관에 두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박물관 건립이 또 다른 사회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김진현 건립추진위원장에게 박물관 건립의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 논의를 계속해 심사숙고한 후에 결론을 내려줄 것을 당부했다. 위원회는 수많은 토론 끝에 대한민국 역사의 분기점을 병인양요로 보는 역사관의 내용을 확정했다.

또한 국민의 관점과 기준이 가장 중요하니, 국민의 목소리와 참여 방안을 마련하도록 위원회에 요청했다. 위원회는 그 일환으로 2010년 6월, 주요 일간지에 ‘기증 공고’를 냈다. 국민들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박물관에 기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2012년 12월까지 구입, 기증, 정부기관 자료 이관 등을 통해 총 3만 9,415점에 이르는 자료를 확보했다. 그중에는 경부고속도로 준공 위령탑 모형, 파독광부·간호사 여권 등 약 150여 명의 국민으로부터 기증 받은 1만 1,543점의 자료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의 이념적 논란과 달리, 우리 현대사에 대한 국민의 자부심을 확인할 수 있는 결과였다.

2012년 12월 26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개관식에 참석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퇴임 전 개관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회가 새로웠다. 퇴임 후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 산업 시찰을 온 외국인들의 산업관광 코스로 인기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과 성공적인 민주화를 배우기 위해 외국인들이 박물관을 찾는다는 내용이었다. 

박물관은 개관한 지 1년 만에 140만 명이 넘는 국내외 관람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젊은 세대들이 보다 많이 와서 전후 세대들이 희생을 통해 이루어낸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길 기대한다.




프랑스에 간 외규장각 도서가 돌아오다

2011년 5월 14일, 프랑스 공식 방문 중에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재(在) 프랑스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를 만났다. 박 박사는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보라는 스승 이병도 서울대 교수의 당부를 받고, 1955년 한국여성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 

박 박사는 프랑스의 도서관과 고서점을 뒤지며 외규장각 도서를 찾아 헤맸다. 1979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하던 중, 베르사유 분관 폐지창고에 방치되어 있던 외규장각 도서를 발견했다. 이 사실을 한국에 통보하자, 프랑스 국립도서관은 그녀를 권고사직 시켰다. 그러나 박 박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한국 정부 및 민간단체와 연합해 반환 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의 동기를 제공하신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반을 박 박사께서 해내신 겁니다.” 나는 진심 어린 감사의 뜻을 전했다. 프랑스는 2011년 4월 14일부터 5월 27일까지 4차에 걸쳐 외규장각 도서를 한국으로 이관했다. 고국을 떠난 지 145년, 우리 정부가 프랑스 정부에 반환을 공식요구한 지 20년 만의 일이었다.

1991년 11월 노태우 정부 당시, 우리 외교부는 프랑스 외교부에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공식으로 요구했다. 우리 정부의 요구를 무시하던 프랑스 정부는 1993년 들어 변화된 입장을 보였다. 당시 경부고속전철 국제 입찰에 프랑스 테제베가 참여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여 ‘교류 방식에 의한 영구 대여’라는 형식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할 뜻을 밝혔다.

이를 계기로 1993년 11월부터 1997년 11월까지 양국 정부 대표 간 협상이 진행됐지만 무산됐다. 이어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4월부터 2004년 8월까지 민간 대표 간 반환 협상이 진행됐지만 이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12월, 한·프랑스 정상회담을 계기로 다시 양국 정부가 협상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2010년 11월 12일, 나는 서울 G20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날 사르코지와 나는 ‘5년 단위로 자동 갱신되는 대여’라는 방안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할 것을 합의했다. 영구 반환이 아닌 이 같은 방식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외규장각 도서를 영구 반환을 받기 위해서는 프랑스 법률을 개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의회에서 이 같은 법률이 개정되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기 위해 법률을 개정할 경우, 제국주의 시절 프랑스가 외국으로부터 약탈한 수많은 국가의 문화재들을 모두 돌려줘야 할 입장에 처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르코지는 자국 내의 수많은 반대와 여론 악화를 무릅쓰고 5년 자동 갱신 대여라는 방식으로 사실상 영구 반환을 한 것이다.

나는 과거 서울시장 시절의 경험으로 사르코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시 서울시는 거북선을 한 척 보유하고 있었다. 이 거북선이 한강에 있는 것보다는 통영에 있는 것이 문화적 가치를 더 높일 수 있을 것 같아 통영시에 기증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방자치단체끼리는 기증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공무원들이 반대했다.

이 일이 있고 이틀이 지나서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법으로 기증을 못하게 되어 있다면 서울시가 통영시에 거북선을 영구임대해주는 방안은 어떠냐고 물어봤다. 규정을 찾아보라고 하자 공무원들은 임대를 못한다는 규정은 없다고 했다. 결국 서울시는 거북선을 통영시에 영구 임대 형식으로 보낼 수 있었다. 사르코지의 입장도 당시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영구 반환이 아닌 임대 방식의 반환이라는 이유로 국내 일각에서는 비난의 목소리가 나왔다. 심지어는 우리 국보급 문화재를 프랑스에 보내는 조건으로 외규장각 도서를 임대 받았다며 제2의 을사늑약이라는 주장까지도 나왔다. ‘한·프랑스 수교 130주년 기념의 해(2015~2016년)’를 계기로 우리 문화재가 프랑스에 잠시 전시되는 사실을 두고 이 같은 억측을 한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거센 반발이 일었다. 2010년 10월 18일,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Liberation>은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들의 입을 빌려 “양국 정상의 합의는 프랑스 국립도서관과 문화부의 입장에 반하는 결정”이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리베라시옹>은 “이번 결정은 국내법과 상충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전 세계 박물관과 도서관 등을 상대로 줄기차게 벌이고 있는 다른 나라들의 반환 요구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이번 결정은 그동안 요구해온 ‘상호 등가’ 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있는 형식을 묵살하고 ‘5년 단위 갱신 대여’라는 포장을 한 ‘사실상의 반환’”이라 꼬집었다.

2011년 4월 14일, 프랑스가 보관하고 있던 외규장각 도서 297권 중 1차분인 75권이 국내에 들어왔다. 나는 박병선 박사에게 전화로 이 소식을 알리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또한 프랑스를 방문하게 되면 박 박사를 꼭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했다. 2011년 5월 14일, 박 박사와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섭섭한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밥 먹고 할 일 없으면 낮잠이나 자라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골치 아프게 왜 찾아냈느냐는 것이지요.” 박 박사의 얼굴엔 감회가 서렸다. 

나는 이야기했다. “어제 사르코지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외규장각 도서 얘기를 맨 먼저 꺼내더군요. 프랑스 내에서도 반대가 많아 역대 대통령들이 돌려주는 결정을 못했던 겁니다. 사르코지 대통령도 ‘프랑스 국내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인심 잃고 싶지 않았지만 한국민들의 따뜻한 마음을 생각해서 결심하게 됐다’고 말하더군요. 그런 점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에게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5월 말에 마지막 인도분이 돌아오면 정부에서도 행사를 할 계획입니다. 건강이 허락하시면 꼭 참석해주세요.”

그러자 박 박사는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초청해주시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가겠습니다. 저는 외규장각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전송은 못했지만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박 박사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외규장각 반환에 평생을 바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2011년 6월 11일, 경복궁 근정전 뜰에서는 ‘외규장각 귀환 환영대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날 박 박사를 비롯하여 프랑스 내에서 반환을 주장한 자크 랑( Jack Lang) 전 프랑스 문화장관, 뱅상 베르제(Vincent Berger) 파리7대학 총장 등이 참석했다.

프랑스 외규장각 도서 이외에도 임기 중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조선왕조 의궤 1,205권을 돌려받고(6장 간 나오토 담화 참조), 미국 워싱턴D.C. 소재의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을 102년 만에 매입 환수했다. 그로 인해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자, 2012년 해외에 산재한 우리문화재를 체계적으로 환수하기 위해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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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리스트
  • 이충웅 2018-03-02 02:18:59
    힘내십시요~!!
  • 이충웅 2018-03-02 14:32:56
  • 이충웅 2018-03-02 14:4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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