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그렇게 진술한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 봐요.”
김백준의 허위진술에 대해 설명드리면 MB는 늘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이같이 말했다. 여전히 김백준에 대한 마지막 신뢰를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실 김백준의 검찰 진술에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조사할 때마다 진술이 뒤바뀌는가 하면, 심지어 같은 조사에서 검사의 같은 질문에 다른 취지의 진술을 하기도 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나올 수 없는 진술들이다.
다스 소송비용 처리와 관련해 2008년 3~4월께 김석한이 MB에게 보고했다는 진술의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김백준은 크게 세 가지 취지의 서로 다른 진술을 번갈아가며 했다. ▲미국 로펌 '에이킨검프'가 다스 소송을 무료로 해줬다는 내용과 ▲초기에는 현대자동차에서 다스 소송비용 등을 지원하다가 2009년부터 삼성에서 지원했다는 내용 ▲그리고 처음부터 삼성이 다스 소송비용 등을 지원했다는 진술이다.
같은 날 조사에서도 이 같은 서로 다른 진술이 오락가락 번갈아 나오는 상황이라면, 김백준 진술의 신빙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검찰은 김백준의 이 세 가지 진술 중 마지막 것, 즉 처음부터 삼성이 자금을 지원했다는 진술을 채택해 MB를 기소했다. 김백준의 말을 믿고 현대자동차를 압수수색했으나 아무런 혐의도 찾아내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 김백준이 경도인지장애 치료를 받았다는 내용의 요양급여 내역.
물론 위의 세 가지 진술 모두 허위임이 입증됐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김백준은 2008년 9월까지 에이킨검프가 다스에 소송비용을 청구하지 않은 이유를 몰랐고, 따라서 2008년 3~4월께 다스 소송비용 처리 관련 보고를 MB에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변론을 준비하던 중 김백준의 뒤죽박죽 진술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요양급여 내역을 확인해 보니 김백준은 검찰 조사를 받기 3개월 전인 2017년 10월26일부터 ‘경도인지장애’에 따른 치료를 받았음이 드러났다.
경도인지장애란 인지기능이 저하된 치매의 전 단계다. 의학계 관련 논문을 찾아본 결과, 경도인지장애 환자가 극심한 스트레스와 육체적 피로에 노출되면 급격히 치매로 전환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했다.
김백준은 2018년 1월17일 구속됐다. 당시 나이는 79세의 고령으로, 구속되면서 급격한 환경 변화로 인해 과중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2018년 4월4일자 김백준의 진료기록을 보면, 가족들은 대진(代診) 시 김백준에 대하여 “체력 저하, 불안, 방금 설명한 것을 다시 되물으신다”는 등의 증상을 호소했다. 이미 구속 2개월여 만에 치매로의 전환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 김백준은 2018년 1월 16일 구속 후 한 달간 대부분 심야조사 또는 12시간 이상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변호인단은 김백준에 대한 검찰 소환 횟수와 빈도, 조사 내용 및 시간을 확인해 봤다. 결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김백준은 구속 직후인 2018년 1월19일부터 설 연휴 전까지 27일 동안 단 이틀만 쉬고 25회 연속 조사를 받았다. 그 중 22회가 12~16시간에 걸친 심야조사였다.
이송시간 및 구치소 기상시간 등을 고려하면, 위의 달력에서 빨간색으로 표기된 날짜의 경우 김백준의 수면시간은 4시간 정도에 불과했다. 전형적인 ‘잠 안 재우기’ 수사로 젊은 사람도 감당할 수 없는 가혹수사를 79세의 경도인지장애 환자인 김백준에게 행한 것이다.
또한 김백준은 구속기간 106일 동안 총 58회의 검찰 조사를 받았는데, 정작 자신의 범죄혐의에 대한 조사는 4회에 불과했다. 나머지 54회는 MB에 관한 조사로 전형적인 ‘별건 구속수사’였다.
형법학자들은 별건 구속수사가 위법이며, 이를 통해 수집된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김백준의 경우처럼 구속수감되어 다른 이의 혐의에 대한 조사를 받는 상황이라면 하루빨리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 검찰이 원하는 거짓 진술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별건수사로 구속돼 가혹수사를 받은 참고인들의 진술에 대법원이 증거능력을 부여하지 않은 판례(대법원 2020.10.8. 선고 2001도3931 판결)는 이미 존재한다. 그런데 그 판례와 비교해 봐도 김백준의 별건 구속수사는 훨씬 더 가혹했다.
변호인단은 항소심에서 김백준 치매 진행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구속수사 이후 병원 진료기록 열람을 재판부에 요청하는 한편, 또한 가혹수사를 통해 나온 김백준의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다는 의견을 각종 판례를 들어 재판부에 피력했다.
▲ 대법원이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별건 구속수사 사례. 김백준 사례는 이례적으로 예외로 인정했다.
검찰은 김백준 병원 진료기록 열람을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진료기록에는 병원명이 적혀 있어 진료기록 열람 시 MB 측 인사들이 병원을 찾아가 김백준을 회유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였다. 변호인단은 병원명을 지우고 진단 내용만 열람하자고 맞섰다.
그런데 재판부는 별다른 이유 없이 김백준의 병원 진료기록을 확인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판결문에서 엉뚱한 근거를 들어 김백준의 정신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김백준이 써서 2017년 말께 MB의 비서관에게 건넨 ‘우연한 인연’이라는 글이 수준이 높다는 이유였다.
황당했다. 김백준의 정신건강 상태는 병원에 진료기록만 요청하면 간단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간단한 절차를 외면하고 재판부는 스스로 김백준의 치매를 진단하고 나선 것이다. 나도 판사생활을 오래 했지만, 판사가 의료 진단까지 한다는 말은 생전 처음 들어봤다.
별건구속 및 가혹수사에 대해서도 검찰은 김백준 조사 시 변호인을 대동했으며, 충분한 휴식시간을 줬다고 주장했고, 재판부는 검찰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김백준 소환의 횟수와 빈도, 조사 내용 및 시간 등 변호인단이 제출한 객관적 자료보다, 검찰의 주관적인 주장에 무게를 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