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의 검찰 진술은 삼성뇌물 사건 외에도 국정원 특활비 수수, 직권남용, 공직 임명 대가 수수 등 MB 혐의의 전반에 핵심증거로 채택됐다.
하지만 김백준의 조서를 보면 진술의 앞뒤가 맞지 않거나, 여러 개의 기억이 뒤섞인 채 하나의 기억처럼 진술하거나,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만 객관적 사실과 달라서 아예 그런 사실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국정원 특활비 수수와 관련해 김백준은 청와대 본관 대통령 집무실에서 MB로부터 2억원을 받아왔다며 검찰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 김백준의 검찰 진술조서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
위 진술 내용을 보면, 김백준이 집무실에서 MB로부터 돈을 건네받는 모습이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 손으로는 2억원이 든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다른 한 손에는 휴대전화를 들어 운전기사와 통화하는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질 정도로 구체적이고 상세하다.
검찰은 이 같은 김백준의 진술을 근거로 “MB가 김성호 국정원장으로부터 국정원 예산으로 마련한 현금 2억원이 든 여행용 캐리어를 교부받았다”며 국정원 특활비 불법수수 혐의로 MB를 기소했다.
그런데 김백준 진술에는 치명적 문제점이 있었다. 청와대 본관에는 에스컬레이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백준은 총무비서관과 기획관으로 청와대에서 4년 가까이 근무하며 본관을 드나들었다. 그런 김백준이 본관의 에스컬레이터 존재 유무를 모를 리 없고, 따라서 정상적 상황이라면 이 같은 허위진술은 나올 수 없다.
▲ 청와대 본관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 에스컬레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같은 진술이 김백준의 검찰 조서 곳곳에 존재하며, 검찰은 이런 허위진술을 근거로 MB를 기소했고, 1심 재판부도 많은 혐의에서 김백준 진술을 근거로 MB에게 유죄를 선고했다는 것이다.
항소심에서 변호인단은 김백준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김백준의 정신건강 상태를 법정에서 밝히고자 하는 의도였다. 변호인단의 예상대로라면 치매로 인해 제대로 된 진술을 하지 못하는 김백준을 불러놓고 검찰이 마음대로 진술조서를 꾸몄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김백준의 치매가 상당부분 진행된 것으로 드러나면 김백준의 검찰 진술은 모두 증거능력을 잃는 상황이었다.
2019년 1월 23일은 김백준 증인신문기일이었으나, 김백준은 법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불출석 사유는 폐문부재(閉門不在:문이 닫히고 사람이 없음)에 의한 송달불능이었다. 김백준 뿐만 아니라 이학수 전 삼성 부회장과 김성우 전 다스 사장 등 MB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핵심증인들이 마치 짜놓은 각본인 듯 줄줄이 같은 이유로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MB 재판은 객관적 물증은 없고 참고인들의 검찰 진술만으로 1심의 유죄판결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검찰진술들을 보면 객관적인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거나 일관성이 결여되는 등 많은 허점과 의문이 있습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핵심증인들을 반드시 이 법정에서 신문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법정에서 재판부에 김백준을 비롯한 핵심증인들을 법정에 불러 신문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다행히 항소심 재판부는 핵심증인들을 꼭 신문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한 달 뒤로 김백준 신문기일을 다시 잡았다.
그러나 2월 14일, 항소심 재판장을 맡은 김인겸 판사가 법원행정처로 발령나면서 재판장이 정준영 판사로 바뀌었다. 이어 열흘 뒤 주심판사 역시 박성준 판사에서 송영승 판사로 교체됐다.
정기인사라고는 하지만 전직 대통령 재판 같은 주요 재판에서 재판부가 바뀌는 일은 사법 역사상 흔치 않은 일이었다. 특히 전임 재판부는 검찰 공소사실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상황으로, ‘대법원의 인사권 행사를 통한 재판 개입’이라는 의혹을 살 만한 여지가 충분했다.
새 재판부가 들어서면서 법정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검사들의 목소리는 커졌고, 재판부는 피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새 재판부 역시 출석하지 않는 증인들에 대한 신문기일을 계속 잡기는 했지만, 전임 재판부만큼의 강한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변호인단은 김백준을 대상으로 구인장 발부를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환장이 송달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소환장이 송달되지 않았더라도, 이미 언론을 통해 소환 사실이 여러 차례 보도되었습니다. 김백준이 자신의 소환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만큼 재판부는 구인장을 발부해야 합니다.”
2019년 4월 24일, 김백준이 다섯 번째 소환에 불응하자 나는 다시 한번 재판부에 구인장 발부를 요청했다. 재판부도 더이상 시간을 끄는 것은 부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마지못해 김백준에 대한 첫 구인장을 발부했다.
▲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2019년 8월 13일 서울고법 형사3부 심리로 열린 본인의 항소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엔 구인영장을 집행해야 할 검찰이 움직이지 않았다. 김백준의 소재가 불분명하다는 이유였다. 김백준의 소재는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백준은 본인의 재판에서 거제도 요양을 근거로 불출석 사유서를 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찰은 움직이지 않았다. 함께 사건을 맡은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김백준의 소환을 검찰이 가로막는 것 같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김백준의 치매를 숨기기 위한 목적이라는 의견이었다.
김백준은 본인 재판에도 불출석 사유서를 내고 계속해서 출석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김백준 재판부는 계속해서 소환에 불응할 경우 김백준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불복해도 과태료만 내면 끝나는 구인영장과 달리, 구속영장은 불응할 경우 지명수배되어 붙잡히는 즉시 구속조치가 이루어진다. 김백준의 입장에서 본인의 재판에 꼭 출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김백준은 결국 2019년 5월 21일 본인 재판에 출석했다. 변호인단은 급히 MB 재판부에 이 사실을 통보했다. 다음날 마침 MB 재판기일이 잡혀 있으니 김백준을 구인해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소환장만 전달했고 구인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백준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국정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냐는 판사의 질문에 답변을 안 하고 멍하게 서 있었습니다. 판사가 다섯 차례나 같은 질문을 해도 김백준이 전혀 대답하지 않자 김백준 변호인이 ‘김백준의 인지능력이 저하되어 답변을 못한 점 사과드린다’며 자신이 답변했습니다.”
이날 재판에 참석해 방청한 사람이 김백준의 인지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내게 전해왔다. 변호인단은 계속해서 김백준의 구인을 요구했지만, 김백준은 이후에도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재판부는 김백준에게 500만원의 과태료 처분을 내렸다.
5월 29일 김백준은 여덟 번째 소환에도 불응했다. 그러자 정준영 재판장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입장을 법정에서 밝혔다.
“김백준을 소환하기 위해 재판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김백준의 검찰 진술에 증거능력을 부여할 수 있을지 여부를 판단해 보겠다. 따라서 이제 불리해진 것은 검찰이니, 변호인단은 증인신청을 철회하고 검찰이 새롭게 증인신청을 해야 할 것이다.”
김백준의 검찰 진술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 변호인단은 증인신청을 철회하라는 요구였다. 그게 억울하면 검찰이 새로 김백준을 증인신청하라는 것이다. 변호인단은 재판부의 말을 믿고 김백준의 증인신청을 취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무슨 이유에선지 재판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김백준은 끝내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검찰이 여유를 부린 이유는 2020년 1월 8일 결심 공판에서 드러났다.
재판부는 본인들이 공판에서 한 약속과 다르게 김백준의 검찰 진술을 그대로 인정해 MB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결과적으로 볼 때 김백준의 검찰 진술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은, 변호인단으로 하여금 김백준 증인신청을 철회토록 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항소심 판결문을 읽으면서, 대법원이 전직 대통령의 재판 과정에서 인사발령을 통해 무리하게 재판부를 바꾼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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