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고문
정부가 영남권 신공항 건설을 백지화하고 김해공항을 신공항 건설 수준으로 확장하는 방안을 선택한 것은 상식과 순리에 따른 당연한 결정이다. 파리공항공단엔지니어링(ADPi)의 용역 결과는 5년 전 확인된 상식을 국제적 신뢰성을 가진 전문가들을 통해 재확인한 것이다. 외국 기업의 중립적·객관적 용역이 정치적 포퓰리즘과 지역이기주의의 거센 광풍에 휩쓸려 사생결단으로 매달려온 영남권과 대한민국을 ‘내란’의 위기에서 구출한 셈이다. 신공항 입지를 외국 기업에 용역을 주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이런 방식으로라도 진실과 합리가 혹세무민을 제압한 것은 다행이다. 무엇보다 신공항에 이해관계를 가진 영남 주민 모두의 값진 승리다.
가덕도로 결정됐다면 부산 시민들은 비행기를 탈 때마다 김해공항보다 편도 택시비 1만5000원을 더 내고 30분을 길에서 더 허비해야 하고 김포행 국내선 항공편은 더 빠른 KTX에 밀려 사라지고 말 것이다. 대구 시민들도 시청에서 7㎞ 거리에 있는 편리한 시내 공항을 상실할 위기를 일단 넘기게 됐다. 80년 된 공항을 허무는 데는 1년도 안 걸리지만 그렇게 가까운 위치에 다시 건설하는 것은 100년이 지나도 불가능하다. 영원히 되돌릴 수 없는 그런 결정을 섣불리 내리면 안 된다.
뉴욕·런던·도쿄 같은 대도시도 소음공해를 감수하고 도심에서 30분 이내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공항을 두고 있는데 부산과 대구의 정치권은 가깝고 편리한 시내 공항을 두고 더 불편하고 먼 곳으로 공항을 옮겨 도시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싸움에 너무 많은 것을 걸고 뛰어들었다. 이제 정부가 제시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해법에서 명예로운 출구를 찾아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고 계속 신공항 타령하며 분란만 조장하는 정치인과 지자체는 국민이 나서서 준엄하게 꾸짖어야 한다.
.ADPi의 용역 결과를 보면서 2011년 3월 30일 이명박 정부의 신공항 백지화가 발표되던 날의 악몽을 떠올렸다. 신공항과 무관한 외교안보수석을 맡고 있던 필자가 느닷없이 논란의 진원지로 뛰어든 날이다. 밀양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다녔고 부산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까지 나온 유일한 수석이라는 이유로 고향의 격앙된 민심을 수습하라는 임무에 긴급 차출된 것이다. 오전에는 밀양에서 삭발한 신공항추진위원들을 달래고 오후에는 부산으로 달려가 시청과 시의회·상공회의소 등을 돌아가며 정부 입장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렸지만 봉변을 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신공항을 둘러싼 갈등을 현장에서 온몸으로 느낀 필자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진실이 궁금한 나머지 김해공항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공군에 공항 확장과 함께 공군기지의 이전 방안까지 검토하도록 요청하게 됐다. 국토교통부가 국방부에 공군기지 이전을 요청한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선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선택의 범위에서 배제할 이유가 없다.
공군이 보고한 검토 결과는 김해공항 확장에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다는 신공항 추진론자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산을 하나도 깎지 않고 대형 기종이 안전하게 이착륙할 수 있는 활주로를 최소한의 비용으로 건설할 수 있는 방안이 나온 것이다. 2039년까지는 공군기지를 옮기지 않고도 늘어나는 여객 수요를 감당할 수 있고 소음 피해 가구도 최소화할 해법이었다. 2039년 이후 김해공항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공군기지를 이전해야 할 상황에 대비해 입지를 검토해본 결과 한적한 여수공항이 최적 후보지라는 결론도 나왔다. 물론 현재의 여수공항은 김해기지에 배치된 모든 자산과 인원을 수용하기에는 협소하지만 활주로를 확장하고 최신의 군 시설과 숙소를 건설하기에 가장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ADPi의 용역 결과는 5년 전 공군이 내부적으로 검토한 김해공항 확장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다. 다만 스케일을 신공항 건설 수준으로 격상하고 경제적·기술적 타당성을 더욱 정밀하고 다양하게 정리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를 기초로 김해공항을 확장하고 부산 도심을 10분대로 연결하며, 대구까지도 한 시간 내에 주파할 고속철도망을 건설한다면 공항 이용자들에게도 최선의 합리적 선택이다. 장기적으로는 대구공항을 민간 공항으로 전환하고 K-2 공군기지의 이전을 계속 검토할 필요는 있다. 다만 경북 지역에 전투비행단을 수용할 만한 입지를 찾는 것이 어렵고 찾더라도 K-2 기지의 소음보다 더 많은 새로운 문제에 봉착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차제에 수원공항 이전도 통일 이후 수도권의 장기적 민항 공항 배치 계획의 틀 속에서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우리의 수도권과 인구 규모가 비슷한 영국 런던의 경우 한 시간 거리 내에 국제공항을 5개나 두고 있다. 서쪽으로 치우친 인천, 김포의 양대 공항만으로 통일시대에 수도권의 여객 수요를 감당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수원공항과 성남 서울공항을 각각 수도권의 남부와 서남부 민항 공항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지금부터 수립해 장기적 항공교통대책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http://news.joins.com/article/20208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