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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화법 폐지하거나 긴급명령 발동해야 최중경 | 2016.03.17 | N0.96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 현 동국대 석좌교수

가계부채 잠재적 연체자를 미리 선별·관리하는 데 행정력 집중해야 할 때… 미·일과의 통화스와프 체결 통해 외환위기 안전판 마련해야

한국 경제가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다는 데 이의를 다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심각한 위기가 올 것인가에 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비관론이 힘을 얻고 있는 모양새다. 한국 경제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부존자원이 없어 수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일부 사이비 경제전문가가 수출 의존 탈피를 부르짖고 있으나 이는 ‘나라가 잘되려면 한반도를 떼어다 캘리포니아에 붙여야 한다’는 수준의 덜 떨어진 주장이다.

대외여건이 나빠져서 해외수요가 줄어들면 수출에 기대야 하는 한국 경제의 동력이 떨어지는 것은 불가피한데 세계 경제는 ‘구조적인 수요 감소’라는 돌이키기 힘든 추세에 들어서 있다. 수요 감소가 구조적인 현상이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근로소득 창출의 기회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이 일자리를 빼앗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로 Clerk(서기)라고 불리거나 그 범주에 들어가는 직업들이 설 땅을 잃고 있다. 공항에 가면 과거에는 카운터에 많은 직원이 앉아서 보딩패스(Boarding Pass)를 발급했지만 이제는 기계에 여권만 대면 보딩패스가 자동으로 인쇄되어 나온다. 대형편의점에 가면 계산대에서 수납 직원 대신 기계가 손님을 맞이하고 결제 업무를 한다. 버지니아 맥클린에 있는 대형 편의점에서는 지불기계를 도입한 후 26명의 직원을 11명으로 줄였다. 11명의 직원은 대부분 짐꾼 역할을 하는 직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근로소득이 줄어들고 구매력이 감소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세계 경제의 성장을 이끌던 브릭스(BRICs) 경제가 주춤하는 것도 큰 마이너스 요인이다. BRICs가 주춤하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고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Trap)이라는 구조적 요인에 의한 것이어서 돌이키기가 쉽지 않다. 선진국과 일부 중진국에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노령화도 수요를 줄이는 중요한 요인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다 보니 길어진 노년에 대비하여 현재의 소비를 줄이려는 경향이 보편화되고 있다.

아시아 국가간 영토분쟁을 유발하고 있는 중국의 굴기(崛起)와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점으로 본격화된 신냉전시대도 경제에는 분명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당사자간에 협력보다는 견제를 우선으로 하게 되기 때문이다. 석유가격이 떨어진 것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수요 감소를 반영하고 있는 것인데 셰일에너지 혁명으로 그동안 에너지 수출을 금지해 왔던 미국이 국제 에너지 시장의 공급자 대열에 새로이 진입한 것이 결정적인 하락 촉발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석유가격 하락으로 중동 산유국들의 씀씀이가 줄어드는 것도 세계경제의 수요를 위축하는 요인이다.

유일한 블루오션의 상실
 
국내 사정을 보아도 만만치 않다. 1200조원에 달하는 가계 부채는 소비를 제약하는 요인일 뿐 아니라 금융시스템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위험을 갖고 있다. 산업이 경쟁력을 잃고 있는 것도 큰 걱정거리다. 경제발전을 이끈 동력이자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포스코(POSCO, 포항제철)가 창업 이래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는 사실이 우리 산업 경쟁력의 현주소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치권은 한가하기만 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키우고 있다. 국회선진화법의 단물에 빠져 있는 국회는 행정부의 경제 입법을 사사건건 훼방하며 자기과시에 몰두하고 있다.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 가라 앉으려 하면 선장에게 전권을 주고 모두 일사불란하게 선장의 지시를 이행해야 살 길이 보이는 것인데 너도나도 의견을 내며 피 같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꼴이다. 노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는 국가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으면서도 복지시스템의 초점을 엉뚱한 곳에 맞추고 있어 해결책 마련이 요원한 것도 향후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어쩌면 유일한 블루오션(Blue Ocean)이라 할 수 있는 남북 산업협력도 개성공단 폐쇄조치로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개성공단이 100% 경제논리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남북 산업협력의 유용성을 실감하게 하는 전시장을 상실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남북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은 한국 경제에 불리하게 작용한다. 남북간 긴장은 돈과 사람이 한국을 기피하게 하므로 긴장이 고조되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북한 경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임을 항시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 한다.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은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 경제가 성공한 이면에는 미국이 동아시아에 공산주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한 역사가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국방비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것도 한몫했다. 미국은 이제 여기저기 들이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인도, 호주와의 4국군사동맹(QUAD)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독려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 소위 아베노믹스라는 근린궁핍화정책이다. 미국이 아베노믹스를 허용한 이유는 장기침체의 늪에 빠져있는 일본 경제를 살려야 재무장에 필요한 자금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엔화의 급격한 평가절하를 가져온 아베노믹스의 최대 피해자는 한국 경제다. 한국 경제가 당면한 수출 급감은 미국의 동아시아정책이 일으킨 파장에 상당부분 기인하고 있다. 미국은 돈을 마구 찍어내 엔화의 평가절하를 유도하는 아베노믹스에는 눈감으면서도 한국 외환당국의 절제된 시장 개입에는 크게 역정을 내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태도를 보면서 한국 경제가 실제 급박한 위기상황으로 몰릴 때 미국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 궁금해진다. 1997년 위기나 2008년 위기 때 보여준 것처럼 미국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미국이 볼 때 한국은 다소 껄끄러운 존재다.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미국이 필요로 하는 기여활동에 적극 나서지도 않는다.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일본과는 날카로운 각을 세우면서도 대립관계에 있는 중국에 필요 이상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보인 것도 신경이 쓰인다. 한국은 미우나 고우나 미국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최강의 군사대국일 뿐 아니라 세계 금융을 지배하는 기축통화국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우리의 안보를 책임지고 있다. 미국과 한국이 대등한 위치에 있고 한국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외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일 뿐 아니라 크게 실수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미국의 적수가 되기 위해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다. 국제 관계는 철저히 힘의 논리가 지배한다. 동네 골목에서 ‘어깨’에게 밉보이면 얻어맞을 일밖에 없듯이 국제관계에서도 최강국에 밉보이면 소외되고 손해보고 보복 당할 일밖에 없다.

대기업 CEO 엄선해서 10년 임기 보장해야

한국 산업이 경쟁력을 잃고 있는 이유를 흔히 너트 크래커(Nutcracker: 호두까기 기계)에 비유하는데 이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지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추격과 일본의 기술 우위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기업의 의사결정구조가 혁신과 거리가 멀다는 데 있다.

현재의 대기업은 혁신적인 방향전환이 어려운 지배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실적주의라는 미명 아래 CEO들의 임기가 보장되지 않고 매년 말마다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을 만들어놓은 채로 혁신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연말마다 마음 졸이는 CEO의 목표는 1년이라도 임기를 더 연장하는 것이기에 단기성과에만 매달리게 된다. 10년, 20년 앞을 생각하는 시늉은 내겠지만 당장 수익을 내지 않는 장기과제에 지금 이 시점에 투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해 한 해 행동을 미루면서 한국 산업의 노쇠현상이 현실로 다가올 동안 새로운 먹거리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대기업 오너들은 실적주의가 부르는 폐해에 주목해야 한다. 당장 돈을 벌라는 추상 같은 명령이 기업의 노쇠현상을 부른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제대로 된 CEO를 엄선해서 최소 10년의 임기를 보장하고 연임도 가능하게 해야 당면한 경쟁력 상실문제의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 외부인사로 구성된 자문그룹을 활용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야 오너의 식견을 넓히고 대리인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어 신성장동력을 제때에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관료의 전문성과 업무 집중도가 순환보직에 의해 크게 떨어지고 있는 것도 산업경쟁력 약화의 한 원인이다. 장관 임기가 길지 않은데 정부 의사결정의 핵심이 되어야 할 중앙부처 국장, 과장의 보직기간이 1년 남짓한 상황에서 기업이 필요로 하는 정부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길 기대하긴 어렵다. 대기업과 정부의 의사결정 중추가 모두 어정쩡한 상태에 있다 보니 신성장동력 발굴이나 신시장 개척에 따르는 위험과 소요시간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산업 경쟁력 저하의 근본원인임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경제에 위기가 온다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게 될까? 우선 전 세계적인 수요 감소와 산업경쟁력 저하로 수출이 감소되고 국내 경기가 침체된다. 경기가 어려워지면 가계부채를 갚지 못하는 사례가 많아지고 담보로 제공된 부동산의 경매 건수가 늘어나게 되어 부동산 가격의 하락국면을 맞게 될 것이다. 부동산 가격의 하락은 경기침체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은행의 부실채권이 급증하여 경매 건수가 급증하면서 부동산 가격 하락속도가 빨라지고 은행의 자본 적합비율(CAR)이 크게 낮아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국내은행에 크레딧라인을 제공했던 외국계 은행들이 크레딧라인을 축소하게 되고 주식·채권시장에 들어와 있던 외국 자금이 빠져 나가게 되는데 이 속도가 과도하면 외화 유동성 위기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이 과정에서 북한 리스크까지 겹치면 진행속도가 더 빨라지게 된다. 이러한 위기 발생 경로는 97년 위기와는 다른 형태이며 80년대 스칸디나비아 유동성 위기와 유사한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환보유고가 충분하고 외채 구조가 좋아서 외화 유동성 위기가 올 가능성이 낮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견해다. 97년 아시아 외환위기와 같이 대외부문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위기형태는 외환보유고를 두텁게 쌓고 외채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대비책이 될 수 있지만 대내부문에서 시작되는 위기는 대내부문에서 원인을 제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스칸디나비아형 위기가 온다면 우리나라 은행과 기업은 외국자본에 인수될 것이다. 무상복지 타령으로 재정에 여유가 없기 때문에 국유화를 통한 위기극복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민간부문도 인수 여력이 있는 기업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50년 피땀으로 일군 산업이 외국인의 품에 안기는 쓰라린 상황, 특히 미친 듯이 찍어댄 엔화에 의해 알토란 같은 기업이 인수되는 모습이 마치 국치일을 연상하게 할 것이다. 그러기에 위기는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한반도 긴장 적정수준에서 관리돼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길은 있다. 발상의 대전환을 통해 국정 어젠다를 확 바꾸면 큰 피해 없이 지나갈 수 있다. 우선 전문성도 없는 상태에서 턱없이 높이 올라간 국회의 위상을 낮추고 행정부 주도의 국정운영 체제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회선진화법을 즉각 폐지해야 하고 폐지가 여의치 않으면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동하는 것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가계부채가 핵폭탄이 되지 않도록 잠재적 연체자를 미리 선별해서 집중 관리하는 데 행정역량을 모아야 한다. 정부가 주도하는 대규모 기업구조조정은 경기가 좋을 때 선제적으로 실시하는 것이라 이미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대출 심사를 강화하고 경기침체에 따라 어려움을 겪는 기업을 그때그때 엄격히 선별하여 회생 가능한 기업만 지원하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위기가 다가오는데 정부 주도의 선제적이고 대규모의 기업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것은 피할 수도 있는 위기를 스스로 부르는 패착이 될 수 있다. 외환부문의 방어벽을 높이 쌓는 노력과 함께 특히 개별 은행의 외채구조와 외화유동성 그리고 자본적합비율을 철저히 관리해야 한다. 은행이 과두체제에 있기 때문에 하나만 외화유동성 위기를 맞아도 전체 은행의 신뢰성이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은행 하나하나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선제적 예방조치가 필요하다. 복지확대보다는 투자확대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예산편성을 해서 재정의 경기부양능력을 확충해야 한다.

노동시장 개혁은 계속 추구하되 목숨 걸고 올인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경기가 침체되고 자연스럽게 일자리를 잃는 사람이 속출할 가능성이 있을 때 굳이 정부가 나서서 분위기를 더 어수선하게 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위기에 수반되는 금융시장의 경색, 즉 크레딧 크런치와 위험 회피 현상(Flight to Quality)을 극복할 대책을 미리미리 수립해야 한다. 2000년의 P-CBO와 회사채신속인수제도 매뉴얼을 다시 꺼내 들고 회사채시장의 경색을 막을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최근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과 장거리미사일과 같은 기술의 인공위성 발사로 인해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고 역대 가장 강력한 유엔제재조치가 신속하게 채택되었다. 중국과 러시아가 생각보다 순순히 제재조치에 동의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한국이기 때문에 긴장 수준을 적정수준으로 관리해야 한다.

무엇이 적정수준이냐고 묻는다면 답하기 쉽지 않으나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대한 답은 있다. 우선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통일이고 그것도 평화통일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긴장 수준을 관리해야 한다. 아무리 화가 나고 배신감을 느껴도 극한대결은 언제나 답이 아니다. 따라서 외교·안보 당국은 북한에 대해 호의적일 수 없는 미국과 일본이 만들어내는 긴장의 크기를 계산하고 그에 따라 대응전략을 강구해야 한다. 긴장의 크기가 모자라면 조금 앞으로 나가고 너무 크다 싶으면 긴장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미국, 일본과 반대의 행마를 하는 지혜로운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우리가 주도적 위치에 서겠다고 앞서 나가는 것은 하책이다. 앞서 나간다는 것은 우리의 카드를 미리 내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긴장의 크기를 조절할 수단을 잃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최근에 개성공단이 신속히 폐쇄된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전략적으로 볼 때 너무 빠른 행보였다. 미국, 일본과 중국, 러시아의 반응을 보아 가면서 적정 시점과 적정 수위(영구 폐쇄냐, 잠정 폐쇄냐)를 결정해야 옳은 수순이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카드의 전략적 가치를 극대화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6개월 잠정 폐쇄 카드를 썼다면 5개월쯤 후에 우리 주도로 상황을 관리할 수 있게 될 됐을 것이다. 다른 모든 제재조치는 그대로 있고 잠정 폐쇄를 연장할 것인가의 여부만 남게 되므로 북한 당국도 주변 4강도 모두 외교·안보당국의 조치를 예의주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시장을 이기지 못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결코 앞서 나가지는 않으면서도 적절한 시점에 회심의 카드를 던져 국익을 챙겼다. 국군 단독의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는 적과 미국을 동시에 압박하는 고도의 심리전략을 구사해 적이 많은 양보를 하게 하면서 미국으로부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 내는 노련함을 보였다. 평정심에 입각한 전략적 사고는 외교·안보 당국의 제1덕목임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돌격 정신에 투철한 강골은 상대적 약자인 한국의 외교·안보전략 수립에 적합하지 않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 한 외교·안보 당국의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행마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일본의 마이너스금리 정책은 아베노믹스의 마지막 피치이자 실패의 구렁텅이를 예고하는 전주곡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로 인해 촉발되는 아사아 통화들의 경쟁적 평가절하와 미국의 대응이 더 문제다. 미국은 BHC(Bennet-Hatch-Carper) 수정법안을 통해 환율조작국을 지정하고 무역보복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전제조건이 미국과의 교역에서 대규모 흑자를 실현하는 것이어서 한국이 속죄양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도 제재 대상에 들겠지만 중국과는 흥정할 건수가 많고 제재에 따른 역풍 등 부담도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만만한 한국을 타깃으로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특히 아베노믹스가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전략의 부산물이며 일본 경제 부흥의 걸림돌 중 하나가 한국 산업과의 경쟁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베노믹스를 밀어주는 숨은 목표 때문에 한국이 속죄양이 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그렇기 때문에 속죄양이 되지 않기 위한 전방위적 노력을 해야 한다.

경제부총리가 미국 재무장관을 만나야 하고 국회의원들도 미국 의회 설득에 나서야 한다. 기획재정부 외환정책라인도 미국 재무부 라인과 스킨십을 강화해야 한다. 국제회의 사이드라인에서 형식적으로 사진이나 찍으려 하지 말고 직접 워싱턴을 자주 방문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또한 워싱턴에 있는 싱크탱크와의 교류도 강화해야 한다. 환율문제에 있어 의견이 다른 여러 싱크탱크를 통해서 BHC수정법안의 부당함을 알려야 한다. 특히 한국의 환율문제에 대해 늘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는 피터슨연구소와 심도 있는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 금리정책이나 환율정책은 가급적 공감대를 이루며 수행해야 하겠지만 외부, 특히 미국의 부당한 압력과 제재에 대해서는 분연히 맞서는 결기를 보여야 하고 필요하면 국제 여론전도 불사해야 한다. 위기조짐이 있으면 원화가치가 하락하게 된다. 이때 외환당국이 보유한 달러를 팔아서 원화가치를 지켜야 할 것인가? 만약 원화가치 하락이 진정되지 않고 계속 달러를 팔아대면 외환보유고가 급속히 줄어들어 투기꾼을 더 많이 불러들이게 되는데 외환당국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외환위기가 올 수도 있고 피해 갈 수도 있다. 최근 중국의 외환보유고가 크게 감소하고 있다. 이는 중국 외환당국이 달러를 매도하는 개입을 하기 때문으로 보이는 데 매우 위태로워 보이는 정책이다.

‘중앙은행이 시장을 이기지 못한다(Central Bank can’t beat the market)’는 격언은 외환보유고 감소가 수반되는 매도 개입의 위험성을 지적한 것이다. 매수 개입의 경우에는 외환보유고가 오히려 늘어나기 때문에 특별한 위험이 없다. 2003년과 2004년에 이루어진 대규모 외환시장 개입은 매수 개입이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음에도 달러평가손실이 난다는 이유로 담당 관료들이 좌천됐다. 달러를 굳이 원화로 평가해서 득실을 따지고 공과를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외환위기가 오면 환율이 다락같이 올라 막대한 규모의 달러 평가이익이 생기는데 그렇다면 외환위기를 부른 담당 관료들을 표창해야 하는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달러는 달러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 굳이 원화가치로 측정할 이유도 의미도 없다. 외환당국은 1997년 상반기에 당시로서는 꽤 큰 규모의 매도 개입을 단행했는데 위기의 고비에서 부담으로 작용한 경험이 있다. 외환보유고가 BIS 기준 적정 규모에 미달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외환당국이 매도 개입에 나서는 것은 개입 이유가 어떻든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통화전쟁에 대비하자
 
2008년 위기를 순조롭게 넘긴 것은 2003년과 2004년에 파생시장 개입으로 확보한 달러매수권을 활용해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미국과의 통화스와프를 성사시켰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2000억 달러 아래로 가면 본격적 외화유출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시장의 판단보다 오랜 기간 2000억 달러 위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원동력이 좌천됐던 담당 관료들이 파생시장 개입을 통해 확보한 달러 매수권을 행사하여 얻은 달러였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지금 대미관계가 껄끄러워 통화스와프의 추진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통화스와프의 길을 열어야 한다. 위기의 불을 확실하게 끄는 방법은 기축통화국의 중앙은행과 연결고리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조하지만 미국과의 동맹이 중요한 것은 안보 때문만이 아니다. 소규모 개방경제(Small Open Economy)로서 외환위기 가능성에 상시 노출되어 있는 한국경제에 외환위기라는 불똥이 떨어졌을 때 소방수 역할을 확실히 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기 때문이다.

통화스와프는 정상회담의 아젠다로 추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전승기념일 행사 참석, 사드 배치를 둘러싼 논란, 공중급유기를 유럽 에어버스에 내준 것 등에서 앙금이 쌓인 미국의 섭섭함을 풀기가 쉽지 않겠지만 통화스와프는 반드시 성사시켜야 한다. 아울러 한·일 통화스와프도 위기 때 큰 힘을 보태는 것이므로 재개해야 한다. 역사 인식을 둘러싼 갈등으로 중단되었지만 불완전하나마 일단 봉합된 모양새이고 길게 보면 한·일간 정경분리 원칙이 지켜지는 것이 두 나라 모두에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외환보유고가 충분하고 외채구조가 양호해서 위기는 오지 않는다. 미국은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어느 경우에도 한반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국군이 세계 7위의 강력한 군대여서 누구도 함부로 못한다. 한국도 컸으니 강대국들과 대등한 외교를 해야 하고 국제 무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북한이 붕괴되면 중국이 남한주도 통일을 도와줄 것이다. 살만 하니 성장보다 복지에 신경 쓸 때다. 내수를 키워서 수출 주도에서 탈피해야 한다. 제조업은 한계에 왔으니 서비스업만이 살 길이다….”

모두 지나친 자신감, 무지 또는 정보부족에서 비롯된 잘못된 믿음이다. 이렇게 경제 정책과 외교·안보 정책을 수립한다면 대한민국의 앞길은 매우 험난할 것이다. 지금은 촌스럽게 느껴지지만 ‘허리띠를 졸라매자’는 박정희 시대의 구호가 여전히 유효한 나라다. 경제성장도 더 해야 하고 국방능력도 많이 키워야 한다. 냉정하게 보면 아직도 대한민국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약자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 국무 위원들부터 국제무대에 임하는 자세를 다시 가다듬어야 한다. 주도할 수도 없는 걸 주도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국내용 홍보에 공들이다가여 상대방의 빈축을 살 게 아니다. 겸손한 태도로 조용하고 냉정하게 실리를 추구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중앙시사매거진>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원문보기: http://jmagazine.joins.com/monthly/view/310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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