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협 KAIST 경영대학 초빙교수·前 청와대 녹색성장기획관
A회사에 신임 사장이 기세 좋게 취임했다. 주주와 직원들의 박수 속에 경영회의를 개최한 사장은 야심 찬 구상을 발표한다. 간부들은 납작 엎드려 실천을 다짐한다. 사장 눈에 띈 몇몇 간부는 승진한다. 부럽긴 하지만 대다수는 사실 몸조심을 한다. 사장이 정확히 언제 물러날 것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개혁을 강조하는 사장을 너무 따르다가는 자칫 전임 사장과의 차별화를 내세우는 다음 사장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번 사장과 연이 닿지 않는다면 다음을 기약하고 열심히 하는 척하는 게 상책이라는 매뉴얼을 그들은 돌려본 지 오래다.
이 회사에 납품하는 업체들 역시 임기가 정해진 `과객사장`보다는 이보다 훨씬 오래 근무할 임직원들이 더 중요하다는 걸 꿰차고 있기에 기존의 네트워크를 단단히 하고 새로운 참여자를 봉쇄하는 `그들만의 리그`에 몰두한다.
이 회사 이사진은 더욱 가관이다. 경영 성과가 아니라 경영권 쟁취 혹은 계승에 온 신경을 쓰고 있다. 미래를 위한 투자나 연구개발(R&D)이 아니라 당장의 배당을 어떻게 늘려 주주의 환심을 사느냐가 이들에겐 중요하다. 경우에 따라선 암투나 꼼수를 불사하고 이사회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 회사 과연 잘될 것인가?
경쟁 회사들은 제법 좋은 제품을 내놓았던 A회사를 내심 경계해왔지만 이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 사장이 바뀔 때마다 브랜드가 바뀌고 상품도 달라지기 때문에 내공이 축적되지 않는 회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 회사 옆에는 열악한 회사 B가 있다. 악덕 오너가 수십 년간 횡령과 배임을 일삼으며 종업원들을 착취해왔다. 주변에서는 파산이 임박했으며 조만간 A회사와 합쳐질 것이라고 예상하곤 했다.
하지만 B회사는 오랜 시간 필살의 신제품 개발을 준비해왔고 이제 그 출시를 통해 판세 뒤집기에 나섰다. A회사는 이에 대해 우리도 진작 그 제품을 개발했어야 한다는 파와 그 제품은 무시해도 된다는 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다.
B회사 수뇌부는 A회사의 사장 교체기가 될수록 커지는 그런 속성과 사이클을 잘 알고 있기에 부실 경영에도 큰소리친다. A회사는 주기적으로 같은 양상을 반복한다. 정관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미래는 과연 어떤 것일까?
이른바 87년 체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선사했다.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바꾸고 국회의원들도 적어도 선거 때는 우리에게 절하게 했다. 민주화의 성과다.
하지만 제도의 경직성을 초래했다. 잘하든 못하든 5년이란 임기로 보장되거나 국한된다. 관료들은 시한부 정권에서의 처세를 습득했고 이해집단은 이를 초월해 결속한다. 국회는 염치없이 자기 이익 충족의 권세를 뽐내지만 견제받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국정운영 노하우는 학습과 축적은커녕 차별과 단절의 대상이 됐다. 5년 단기주의에 빠진 대한민국의 미래 전략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밖을 보라. 중국의 경우 2012년 주석에 취임한 시진핑이 한국 대통령이 세 번 바뀌게 되는 2022년에 퇴임한다. 일본의 아베 신조는 2021년까지의 장기 시나리오를,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2018년 4선에 도전해 20년 집권을 꿈꾸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17년까지 3연임 12년 체제를 이미 만들었고, 미국은 그나마 짧지만 버락 오바마에 이어 힐러리 클린턴까지 당선된다면 12년간 연속성이 이뤄진다. 북한은 알다시피 올해로 `김패밀리` 집권 71주년이다.
이런 안팎의 여건에서 대한민국의 미래 전략은 과연 어떻게 지속성을 확보할 것이며 이를 구현할 국가 거버넌스는 무엇일까. 청와대 생활 5년 내내 필자를 끊임없이 따라다녔던 고민이다.
한국의 정치를 권력을 향한 `소용돌이의 정치(politics of vortex)`라고 묘사했던가. 어쩌면 여기에 `태엽 감기 정치(politics of clockwork)`가 추가될지도 모르겠다. 선거철이면 어김없이 새로운 정치를 약속하며 시계태엽을 감지만 결국은 전진 없이 제자리로 돌아와 이를 반복하는 정치. 시스템 리스크가 이처럼 누적된다면 대한민국과 A회사의 미래가 어찌 다를 수 있겠는가. 세상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포스트(Post) 87 체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부름에 응답해야 한다.
<매일경제>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원문보기 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6&no=161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