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완 성균관대 교수·행정학, 前 기획재정부 장관
정부가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한다. 경제가 기대만큼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주택과 주식 거래가 늘어나는 등 자산시장 이 나아지는 기미는 있지만, 수출과 투자가 부진하고 청년실업률은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등락을 거 듭하던 소비마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여파로 외 국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지는 등 어려움에 빠져 있다.
상황이 이런 만큼, 추경예산 편성의 당위성을 주장 할 수도 있겠다. 지지부진한 경기에 불씨를 지펴보려고 한국은행이 올해 들어 두 차례나 기준금리를 내렸는데, 이제는 정부가 화답할 차례라는 목소리도 나올 법하다. 다만, 추경예산을 편성하더라도 다음 네 가지 관점에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다.
첫째, 추경예산이 법적 요건을 충족하는지 잘 따져야 한다. 「국가재정법」 제89조는 추경요건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전쟁, 대규모 자연재해, 경기 침체, 대량 실업 등 대내외 여건에 중대한 변화가 있는 경우에만 추경을 허용하고 있다. 올해 성장률이 애초 목표치보다 1%p가량 낮아질 정도로 경제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상황이 위에서 열거한 요건에 해당하는지는 의문이다.
2%대 성장률을 걱정해 추경을 편성한다면, 자칫 추경이 연례행사로 변질되고 추경 불감증을 유발할 수 있다. 그러지 않아도 올해는 재정적자폭을 애초 중기재정계획보다 늘려 잡았고 확장정책 기조를 유지해왔던 터라, 추경은 정부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손 쉬운 수단에만 의존하는 경향을 심화시킬 수 있다.
둘째, 추경예산이 잉태할 중 · 장기적인 부작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재정 건전성은 선진국과 비교하면 아직 나은 편이지만, 최근 20년 동안 가파르게 악화되고 있다. 더욱이 압축 고령화와 남북한 통일 등으로 앞으로 재정 소요가 많이 늘어날 전망 이므로 긴장의 끈을 바짝 조여야 한다.
주요 선진국들이 ‘부채에 의존하는 성장’을 지속하면서 경고음이 나오고 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지난 20년 동안 OECD 회원국들의 총부채(정부, 기업 과 가계의 부채 합계)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0%p 이상 늘어났다. 이에 따라 글로벌 자산 Stock이 7배나 급등했다. GDP 1달러를 창출하는데 소요 되는 부채도 팽창 일로에 있다. 1929년 ‘대공황’ 당시 2.6달러 선에 이르렀다가 1950년대에 1.3달러까지 안 정되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 3달러를 훌쩍 넘어서 더니, 최근엔 어느덧 5달러 선마저 돌파했다.
그 여파로 실물경제가 나아지면 오히려 주가가 하락하고, 실물경제가 위축되면 주가가 반등하는 기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꼬리가 개를 흔들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이런 상황이 지속 가능한지를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많은 이들이 이를 ‘시한폭탄 돌리기’(Ponzi game)에 비유하며, 글로벌 금융(경제)위기의 반복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물론 나라마다 재정 여건과 ‘기초체력’(fundamental)에 차이가 있고, 또 2007년 하반기 이후 지속하여 온 ‘대침체’(Great Recession) 국면에서 벗어나려면 확장정책이 불가피한 측면은 있다.
그러나 확장정책은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을 어렵게 만든다. 지난 4월 국제결제은행(BIS) Hannoun 사무차장은 ‘양적 완화’가 초래할 다섯 가지 ‘D의 부작용’을 지적했다. 부채감축 애로(disincentive), 구조개혁 방해(distraction), 자원배분 왜곡(distortion), 금융업 혼란(disruption), 중앙은행 역할에 대한 환상(disillusion) 등이 그것들이다. 따라서 확장정책은 정말 어려울 때만 일시적(temporary)으로, 적기에(timely), 목표를 잘 겨냥해서(targeted) 시행해야 한다. 미래로부터 차입하는 성장을 마냥 계속할 수는 없다. 빚내기를 절제하지 않으면, 경제에 거품을 키우고 체질을 허약하게 만들며, 후대에 큰 부담을 떠넘기게 된다.
외환보유고나 경상수지, 정부와 은행의 관리역량 등에 비추어, 우리 경제가 그리스처럼 부도 위험에 처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문제가 불거지면, 세계경제는 또다시 큰 어려움에 빠지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도 덩달아 상당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재정 건전성은 솔(松)과 같다. 겨울을 맞아 비로소 솔의 푸름을 알아서야 되겠는가.
셋째, 불가피하게 추경예산을 편성하더라도 성장잠재력을 끌어올릴 수 있고 흡인(crowding-in) 효과가 큰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 ‘확증 또는 근거에 기반을 두고’(evidenced-based) 될 수 있으면 ‘과녁 효율’(target efficiency)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업만 추경에 포함해야 한다. 오랜 관행, 지역 정서, 불확실한 추론이나 막연한 낙관이 혈세를 쓰는 근거가 되거나, ‘예산폭탄’처럼 무분별한 선심공약이 발을 붙일 빌미를 주어선 안 된다.
특히 복지사업예산은 ‘비가역성’(irreversibility)을 띠므로 신중히 편성해야 한다. 복지의 종착역은 자활이지, 복지 제공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한국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최근 8년 동안 기초수급가구보다 복지 혜택을 받지 않은 빈곤가구의 탈 빈곤율이 더 높았다. 취지와 달리 복지제도가 수혜자로 하여금 ‘복지함정’에 안주하도록 이끈 셈이다. ‘일하는 복지’(workfare)를 강화하고, 소득 보장보다 취약가구 내 취업자 확보에 정책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 적어도 근로 빈곤층이 일하지 않는 복지수혜자보다는 유리하도록 제도를 다듬어야 한다.
넷째, 추경예산 편성과는 별개로 근원적인 구조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해야 한다. 최근의 저성장 기조는 경기순환과정이나 단기 충격보다는 서서히 진행되거나 오랫동안 쌓여온 복합적 · 구조적인 측면에 주로 기인한다. 따라서 수요 촉진이나 경기 대응보다는 체질 강화를 위한 구조 조정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
곧 과잉규제, 정규직 중심의 고용 경직성, 과도한 정책금융과 ‘좀비기업’, 낡은 교육 · 연구개발시스템, 취약한 사회자본(법치, 신뢰, 투명성), 정치권의 ‘표심 경쟁’과 대중인기 영합주의(populism) 등을 바로잡는 데에 힘써야 한다. 특히 소집단 이기주의와 대증요법이 난무하고, 정책논쟁보다 정치공학이나 정치마케팅이 더 주목을 받는 지금 상황이 4색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왕조의 전철로 회귀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국회예산정책처 계간지 "예산춘추"의 2015년 여름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