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화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
그리스 신화의 정점은 트로이 전쟁 이야기다. 그리스 연합군의 아킬레스·오디세우스와 같은 용장들이 트로이와 10년 동안 싸워 이긴 전쟁이다. 마지막에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로 적을 속이고 성을 함락한다.
21세기의 그리스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트로이카’(국제통화기금(IMF)·유럽중앙은행(ECB)·유럽연합(EU))로 불리는 채권단과 어려운 싸움을 하고 있다. 만 40세의 치프라스 총리는 지난 1월 급진좌파연합을 이끌고 집권하면서 채권단과의 재협상을 약속했다. 협상의 최선봉장으로 게임이론을 전공한 학자 출신인 바루파키스 재무장관을 내세웠다.
그러나 트로이카는 완강하다. ‘철의 여인’ 메르켈 독일 총리가 이끄는 EU는 그리스에 부정적인 국내 여론을 등에 업고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는 입장이다. 대규모 금융지원을 했지만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IMF도 라가르드 총재가 내년 재선을 앞두고 더욱 단호한 입장을 택하고 있다.
그리스는 채권단이 제시한 연금과 공무원 임금 삭감, 세금 인상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추가 금융지원과 부채 상환 연기를 요구했지만 협상에 실패했다. 결국 지난달 27일 치프라스 총리가 채권단의 긴축안에 대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7월 5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혼란의 연속이다. 은행 예금의 인출은 제한되고 자본통제 조치가 시작되었다. 지난달 30일에는 만기가 된 15억 유로(약 1조9000억원)의 부채를 갚지 못하면서 71년의 IMF 역사에 처음으로 선진국이 IMF 빚을 갚지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두 열차가 마주 보고 달려오는 ‘치킨 게임’에서는 충돌하면 양쪽 모두 죽을 수 있지만 옆으로 피하면 겁쟁이가 된다. 체면을 잃지 않으려면 충돌할 것을 무릅쓰고 달려서 겁을 줘 상대가 피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정면 충돌로 같이 죽자는 식의 그리스의 벼랑 끝 전술이 잘 먹히지 않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그리스가 부도를 내더라도 유럽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최소화되도록 방화벽을 쌓아 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사실 그리스는 EU 전체 총생산의 1.3%에 지나지 않아 금융시장의 대혼란만 피하면 유럽 경제가 큰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가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택하면 문제가 복잡하다. 유로존 19개 회원국 중 사상 초유의 탈퇴 사태로 예상하지 못한 혼란이 발생할 수 있고 앞으로 키프로스·포르투갈 같은 다른 취약 국가들의 탈퇴도 부추길 수 있다. 유럽의 화약고라는 발칸반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그리스의 지정학적 가치도 중요하다.
그리스 입장에서는 고통이 심한 긴축보다는 자국 통화를 다시 도입해 독자적인 이자율 인하와 환율 절하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그러나 유로존 탈퇴는 심각한 물가 상승과 금융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 국민 대다수도 유로존에 머무르길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서로 막후 협상을 계속하면서 타협해 ‘그렉시트’는 피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그리스 위기가 추가 구제금융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는 2010년 이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총 2300억 유로(약 290조원)의 대규모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경제의 자생력이 살아나지 않고 있다. 생산성이 낮다. 그리스의 1인당 생산량은 독일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나친 복지 지출로 국가 재정이 취약하다. 탈세와 부정부패로 세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리스는 인구 1080만 명의 작은 나라이지만 1인당 소득은 이미 위기 이전인 2007년에 2만8000달러를 넘어서서 지금의 한국과 비슷했다. 그러나 지난 6년간 1인당 실질소득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4%였다. 이제 1인당 국민소득은 2만1700달러 수준으로 낮아졌다. 실업률은 26%, 청년실업률은 50%에 달한다. 그러나 미래의 항로는 아직도 험난하다.
그리스는 우리의 반면교사(反面敎師)다. 서구 문명의 발원지이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진 국가가 생산성을 높이는 노력은 하지 않고 부채와 과도한 복지로 소비를 늘리고 정쟁에만 몰두하다가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연금 개혁, 노동시장 경직성, 금융의 비효율, 민간 부채 증가, 경쟁력 하락은 그리스 못지않게 우리도 안고 있는 문제다.
호머의 서사시 ‘오디세이’에서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귀향하면서 바다의 요정 사이렌의 아름다운 노래에 빠져 배가 난파하지 않도록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고 자신의 몸은 돛대에 끈으로 묶고 항해한다. 인기에 영합하는 달콤한 정책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위기를 겪기 전에 지도자와 국민 모두가 한 몸으로 개혁을 해나가야 선진국으로 가는 순탄한 항해를 할 수 있다.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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