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고문
美의회, 한국 불신 여전한데 골드 스탠더드 막아낸건 성과
그러나 협정문에 긍정표현 있다고 美가 한국의 농축-재처리를
조만간 동의하리란 기대는 착각
비확산 의지 신뢰회복 바탕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독자적 기술개발 나서야
천영우 객원논설위원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고문지난달 22일 타결된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협상은 한국이 처한 현실에서 한국 나름으로는 선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농축과 재처리를 하려면 미국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기존 협정과 달라진 것은 없으나 명시적으로 금지당하지 않은 것이 성과이고, 특히 미국산 천연 우라늄을 사용하지 않는 농축에 사전 동의를 적용받지 않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우리에게 원자력협정의 목적은 평화적 이용에 가해진 제약을 해소하는 데 있다. 한국은 민수용 원자력산업 규모에서 세계 5대 강국으로 성장했음에도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같은 민감 핵 주기 활동을 금지당하고 있다. 지금까지 농축과 재처리를 하지 못한 것은 한국이 항상 평화적으로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 때문이다. 1992년 남북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으로 농축, 재처리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것도 족쇄가 돼 미국에 사전 동의를 거부할 명분을 제공했다.
일본은 이미 2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해 농축과 재처리 시설을 건설했고 이란도 6강과의 잠정 합의를 통해 농축 권리를 인정받은 상황에서 언젠가 농축, 재처리를 할 수 있는 근거와 절차를 마련한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할 수 있다. 이는 한국의 비확산 공약에 대한 미국 조야의 불신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국제사회는 여전히 우리를 핵 물질 실험을 비밀리에 했던 ‘전과자’로 인식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핵심 우방들이 우리의 미신고 핵 물질 실험을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안전조치협정 위반 행위로 간주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부를 시도한 것이 불과 11년 전 일이다. 협정의 개정 협상이 개시된 뒤에도 시도 때도 없이 불거져 나오는 핵 주권론은 아직도 한국이 핵 개발에 미련을 갖고 있다는 의혹을 증폭시켰다.
어느 때보다 불리한 여건 속에 이루어진 협상에서 미 의회가 요구하는 ‘골드 스탠더드(명시적 농축, 재처리 포기)’를 막아 낸 것은 원자력 선진국으로서의 위상과 비중 덕분이다. 협정 문안에 긍정적 표현이 들어갔다고 해서 미국이 머지않아 농축이나 재처리에 동의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면 착각이다. 우리의 비확산 의지에 대한 신뢰 회복을 바탕으로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확실한 명분이 있는 분야에서 독자적 기술 개발로 활로를 찾아야 한다.
향후 원자력 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농축 기술의 연구 개발이다. 사용후핵연료 처분을 위한 파이로 기술의 한미 공동연구도 장기 과제로 소홀히 할 수 없지만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농축 기술의 개발은 시급하고 아무도 시비할 수 없는 명분도 있다.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에 에너지 안보는 바로 국가 안보이고, 전력의 30%를 원전에 의존하는 우리에게 안정적 농축우라늄 공급은 에너지 안보의 근간이다.
농축우라늄의 비축 확대와 외국 농축 회사의 지분 매입도 필요하지만 원전 설비 용량 증가에 따른 리스크를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농축 시설을 보유하지 않더라도 유사시 독자 농축할 카드를 갖고 있어야 핵연료 독과점 업체들의 횡포를 막고 핵연료 시장의 불안정에 대비한 보험도 된다. 실험실 규모의 농축 시설부터 갖추어 당당하게 IAEA에 신고하고 철저한 사찰을 받으면서 미국의 사전 동의가 필요 없는 국산 또는 제3국산 천연 우라늄을 사용해 투명하게 기술 개발에 착수해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를 결심하고 농축 시설을 해체하는 기적이 일어나면 상용 농축 시설 건설은 통일 이후로 연기하면 된다.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는 현재로선 명분도 약하고 핵연료 공급국과 원자로 원천기술 보유국의 동의 없이는 실험도 할 수 없다. 국내 학계가 파이로 프로세싱 연구에 집중하고 있으나 기술적 경제적 타당성을 검증하고 파이로 공법으로 추출된 플루토늄 혼합물을 연소할 신형 원자로를 개발하는 데 20∼30년은 더 걸릴 것이다. 30∼40년 내에 사용후핵연료 재고를 줄일 수준의 상용 시설을 건설할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원전 용지의 저장 수조가 포화상태라고 하나 특수강철용기(드라이 캐스크)로 옮기면 50년은 저장할 수 있다. 현재로서는 가장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대안이다.
사용후핵연료 처분은 누구든 획기적 신기술을 개발하면 모든 나라가 공유할 수 있으나 농축 기술은 독자 개발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 기술 보유국들이 기술을 이전해 주지도 않고 농축 회사 지분을 인수하더라도 기술에 대한 접근은 허용되지 않는다.
<동아일보>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50507/711051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