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화 고려대 교수·경제학
“대중의 지갑을 비게 하는 자는 그들의 마음을 집요한 증오로 채운다.” 셰익스피어의 경고처럼 한국의 1월은 연말정산에 대한 근로소득자들의 불만으로 가득 찼다. 내가 땀 흘려 번 돈을 정부가 왜 갑자기 더 가져가는지 모르겠다고 바뀐 세법을 성토하였다.
유럽의 1월은 돈벼락이다. 유럽중앙은행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3월부터 매달 600억 유로씩 내년 9월까지 총 1조1400억 유로(약 1400조원)의 유로 회원국들의 채권을 매입하고 그만큼 돈을 풀겠다는 양적완화 정책을 발표했다. ‘수퍼 마리오’라는 총재의 별명에 걸맞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큰 규모였다. 유로존 국가들의 주가가 크게 오르고 유로화의 가치가 11년 만에 최저로 떨어지면서 수출과 기업 투자가 증가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미국, 영국, 일본에 이어 유럽의 중앙은행이 양적완화를 대규모로 시작한 것은 유럽 경제의 회복이 느리고 무엇보다 물가 하락(디플레이션)의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유로 지역의 성장률은 지난해 0.8%, 올해 1.2%로 예상된다. 그리스·스페인의 실업률은 25%가 넘는다. 지난 12월 유로 지역의 물가는 한 해 전과 비교해 0.2% 하락했다.
물가가 떨어지면 민간과 정부가 갚아야 할 부채의 실질적인 부담이 많아진다. 현재 유로 회원국들의 평균 정부 부채는 연간 총생산의 96%이고 그리스는 175%에 달한다. 디플레이션은 부채가 많은 가계들의 상환 부담을 높여 민간 소비를 줄이고 실질적으로 차입 이자율을 높여 기업 투자를 위축한다. 일본의 장기 불황에서 보듯이 디플레이션은 경기 침체와 함께 오는 경우가 많아 중앙은행은 이자율을 낮추고 돈을 더 풀어 물가 상승에 대한 기대심리를 높여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유럽중앙은행의 정책금리는 이미 0.05%여서 더 이상 낮출 수 없다. 이제는 최후 수단으로 채권을 직접 매입하고 돈을 풀어 2% 가까운 물가상승률을 달성하고 경제를 살리려는 것이다. 유럽중앙은행의 이번 정책은 디플레이션을 예방하려는 목표가 확실하고 시장의 예상을 넘는 큰 규모여서 앞으로 효과가 기대된다. 물론 생산성이 낮고 채무가 많은 남부 유럽 국가의 구조적인 문제를 유럽중앙은행이 해결할 수는 없다. 독일은 양적완화가 경제 개혁을 더 늦추고 불량 채무국의 위기를 유럽 전체에 파급시킬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매입한 채권의 가치 하락에 따른 손실분의 대부분을 발행 국가의 중앙은행이 부담하고 그리스 국채는 당분간 매입 대상에서 제외하는 타협이 이뤄졌다. 유로존의 복잡한 현실을 반영해 정치적인 합의를 끌어낸 최선의 결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1월 15일 한국은행은 올해 우리 경제의 성장률을 3.4%, 물가상승률은 1.9%로 전망했다. 상반기의 성장률은 3.0%, 물가상승률은 1.2%에 그칠 것이고 하반기에나 좀 더 나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사실 3% 초반의 저성장, 2% 이하의 저물가 상승은 예측치에 불과하다. 정부가 제대로 된 총수요와 총공급의 경제정책을 사용하면 저성장·저물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 경제는 좀 더 높은 성장률을 달성할 충분한 역량이 있다. 2001년부터 2010년까지 평균 경제성장률은 4.2%였다. 인구 고령화가 시작되고, 기업 투자가 위축되고, 생산성 증가 속도가 낮아지면서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자리가 부족하고, 물가상승률이 낮고,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큰 지난해의 지표들은 우리 경제가 잠재성장률보다도 더 낮은 성장 궤도에서 표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시아개발은행의 최근 연구는 제대로 된 경기 대응 정책과 제도 개혁, 기술 혁신을 하면 한국이 연평균 4.5%의 잠재성장률을 달성할 수 있다고 했다.
올해의 물가전망치는 한국은행법에서 정한 물가안정목표제에 따라 달성해야 할 소비자물가 상승률보다 낮다. 2013~2015년 중 물가안정 목표는 2.5~3.5%이다. 그러나 2012년 6월 이후 실제 물가상승률은 목표치를 계속 밑돌고 있고 지난해에는 1.3%에 머물렀다. 물가가 안정적이고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상황은 아니니 다행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통화정책 운용으로 물가상승률이 너무 낮고 경제 회복이 느려지고 있다면 한국은행이 개선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좀 더 높은 성장률과 물가목표치를 달성하면 국민이 원하는 더 나은 일자리, 더 많은 소득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세수도 늘어나 원하는 복지정책을 점진적으로라도 시행할 수 있다.
유럽중앙은행의 양적완화는 과감하고 선제적이며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한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올해 어떤 정책으로 우리의 기대를 뛰어넘는 신선한 기쁨을 줄 것인지 궁금하다. 서민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 줄 수 있는 좋은 정책들을 기대한다.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7055798&ctg=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