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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간의 강물에서김명식 | 2015.01.06 | N0.4

김명식/대구가톨릭대 교수·경찰행정학과


33년간의 공직생활을 마치고 작년 7월 대학교수가 되자, 많은 지인들이 ‘인생 2막’ 또는 ‘제2의 삶’을 고향에서 시작하게 되었다며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감사의 인사말을 보내면서도 이제부터 인생 2막을 시작하는 게 맞느냐는 의문이 생겼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 고유한 이름과 함께 역할이 주어진다. ‘갓난아기에게 무슨 역할이 있나’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 분명히 있다.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아이는 출생신고와 동시에 대한민국의 국민과 거주하는 지역 주민의 지위를 갖는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그를 낳아준 부모에게는 자녀가, 조부모에게는 손주가 된다.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귀여움을 받는 어린이의 행동은 그들에게 중요한 역할이다. 이러한 호칭은 법적 지위임과 동시에 역할이 된다.


생명을 선물로 받은 자연인은 신(神)과 일대일의 관계에서 ‘지금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올바른 존재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본질이지만, 사람을 통해 부여되는 역할은 공동체 관계에서 ‘지금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한 바람직한 규범을 실행하는 데 중점을 둔다. 그런데 사람은 출생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소속된 조직이 달라짐에 따라 역할도 함께 변한다. 새로운 것이 추가되기도 하며 지금까지 맡았던 역할이 다른 사람에게 이전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평생토록 특정한 역할들과 결합하여 살아가며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일생동안 역할의 변화과정은 대략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출생 후 몸과 마음이 자라는 동안 외부로부터 주로 도움을 받는 미숙한 역할 단계이다. 이때는 가정, 학교, 사회, 국가 등으로부터 생존과 사회생활에 필요한 각종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므로 인생 채무는 크게 증가한다. 둘째는 육체의 활동이 왕성한 동안 외부와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성숙한 역할 단계이다. 이때는 직업을 갖고 소득을 창출하며 자녀양육과 부모봉양 그리고 사회와 국가 등에 의무를 다함으로써 부채를 점차 줄여나가게 된다. 셋째는 육체가 쇠약해지면서 그간 받은 것들을 되돌려주는 완숙한 역할 단계이다. 이때는 조부모가 되고 직장에서도 은퇴하지만 건강이 허용되는 한 자원봉사 활동 등을 통하여 남은 채무를 다 갚고 떠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인생은 3막으로 구성된 연극에 비유할 수 있다. 학창생활까지의 1막을 마친 후부터 50대 중반에 끝난 공직생활은 내 인생의 2막이었고 지금은 3막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역에서 은퇴한 것이 아니라 무대만 옮겨 고향의 후학들을 가르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아직도 2막 중이다. 즉 인생 2막을 ‘새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2막의 전편을 마치고 후편이 ‘추가’ 또는 ‘연장’되었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더욱 감사한 일은 전편에 못지않게 후편에서도 더욱 사랑하고 봉사할 구체적 사명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하나의 극작품이 성공하려면 기획자나 출연자 모두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야 한다. 역할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하지만 연기자 스스로 배역을 정하기보다는 평소의 연기를 눈여겨본 연출자가 주로 결정한다. 그러므로 인생의 무대에서 개별적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들을 우연히 찍히는 ‘점’이라고 가벼이 생각하면 안 된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당시엔 하찮게 보인 단순한 점들이 긴 ‘선’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생 1막은 2막에, 2막은 3막에 서로 연결되어 있어 개인은 물론 집합체인 조직이 지금 찍고 있는 모든 점들은 앞으로의 역할과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선이 된다.


멈춤이 없는 시간의 강물은 물길에 따라 때로는 급류를, 때로는 소용돌이를 지나기도 한다. 그 강물과 함께 흐르는 사람들은 각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행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분별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닷새 전 맞이한 2015년이라는 시간의 강물도 어느 길로 흘러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미래학자들은 올해도 나라 안팎의 정치`경제`사회적 환경에 대해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앞으로 맞이하게 될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정직과 성실, 절제의 열매를 함께 맺기를 소망해본다.



매일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504&yy=2015#axzz3bmvjg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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