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식 前 국무총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인 1989년 빌리 브란트 전 독일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때 독일이 언제쯤 통일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고, 참으로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며 아마도 한국 통일이 먼저일 것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다음해 10월 3일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통일 문제에 천착해 온 대정치가의 예견이 무참히 빗나간 것은 통일 문제가 그만큼 어렵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만 독일의 빠른 통일 원인을 살펴보면 우리도 어떤 실마리를 찾을지 모릅니다.
독일은 자신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분단되었을 뿐 동서독 간에 이념 차이에 따른 전쟁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국민 간에 정치 체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적대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한적이나마 가족방문 우편 통신 방송 무역 등 교류 협력이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혜택을 입게 된 동독 정부는 상호주의 입장에서 서독 정부가 요구하는 조건에 나름대로 순응하였습니다. 제공된 지원에 상응하여 반체제 인사 이주 허용, 문화재 복구, 수질 오염이나 산림피해 방지 등 목적 사업을 잘 이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공산독재체제였지만 최고지도자는 교체되었습니다.
독일은 주변 국가들과의 신뢰 형성을 통하여 통일을 위한 여건을 형성하는 한편 변화된 국제환경을 잘 활용하였습니다. 견원지간이라 할 만한 프랑스와의 관계개선에 진력하여 그 결과로 독불우호조약인 엘리제협정을 체결하고, 폴란드와의 국경문제를 해결하고 또한 나치 정권 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나치 협력자에 대한 처벌 등을 통하여 독일이 결코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방해하는 세력이 아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1975년 8월 1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동서독을 포함한 유럽 국가들과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유럽의 안보와 협력관계를 설정하기 위한 유럽안보회의(CSCE) 최종의정서가 독일 통일의 기반을 제공해 주었고, 1985년에 소련의 서기장이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과 독일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가 통일여건 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조국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에 대한 정신적 지원이 동구권 변화에 영향을 주고 이것이 독일 통일에 보탬이 되었습니다.
독일은 시대 상황에 맞는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과 정책하에 통일 정책은 계승 발전하였습니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이른 시간 내에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국력을 키워 통일에 대비하고자 하였습니다. 국가 안보를 위해 군사적으로 재무장하여 나토에 가입하고, 서방 경제권에 편입하여 사회적 시장경제를 통하여 경제부흥과 복지사회를 이루며, 이른바 힘 우위의 정책(die Politik der Staerke)을 펴면서도 당시 소련과의 관계 개선에 진력하였습니다. 1969년 좌파 사민당으로서 최초로 집권에 성공한 빌리 브란트는 신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하여 동방정책을 펴 동서독 간에 교류 협력을 진전시켜 통일의 기반을 닦아 나갔습니다. 1982년 정권을 탈환한 우파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동방정책을 계승 발전시켜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일을 이루어냈습니다.
독일 통일에는 깨어 있는 동독 주민의 평화적 혁명 의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동독 주민에게 그와 같은 의식을 심어준 것은 위에서 본 교류협력 외에도 교회 간 교류, 지방자치단체 간 교류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통일의 원동력이 된 것은 서독의 경제력이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동독 경제는 사실상 서독 경제에 예속된 상태였습니다. 서독의 차관이나 지원이 없으면 붕괴될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사정들에 비춰 본다면 우리의 통일 여건이 너무 취약하고 힘들어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낙담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독일의 사례를 참고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도리를 꾸준히 해 나가야 합니다. 어떻게?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습니다.
<매일경제>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원문보기: 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6&no=176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