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황식 前 국무총리
오늘날 독일이 그 역사상 최고의 평화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것은 정치가 이를 뒷받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독일 정치 특색의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충분한 경험과 경륜을 가진 검증된 정치가들에 의한 정치, 곧 중후(重厚)한 정치입니다. 역대 총리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주지사, 여러 부처의 연방장관, 다선의 연방하원의원, 당대표나 간부 등 풍부한 행정경험과 정치경험을 쌓고서 총리로 선출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각자 그 시대에 맞는 역할을 통해 업적을 남겼으며 누가 더 잘했느냐의 평가는 할 수 있을지언정 실패한 총리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20대 초반 지역 단위에서 정당 활동을 시작하여 중앙으로 진출하고 다선 하원의원들이 연방차관 나아가 연방장관이 되는 것입니다. 끝없는 학습과 훈련의 연속으로 경륜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허망한 인기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거나 유력자가 만들어준 낙하산을 타고 나타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독일 정치에 신데렐라는 없습니다.
또한 국민들이나 당원들은 일단 선출된 지도자들에 대하여 신뢰를 보내고 흠이 없는 한 싫증을 내지 않고 장기 재직을 허용하고 있어 정책의 장기적·안정적 수행이 가능합니다. 초대 총리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끈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14년간, 독일 통일을 이끈 헬무트 콜 총리는 16년간, 지금 유럽연합을 이끌고 있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8년 재직 후 다시 3연임하여 재직하고 있으며, 헬무트 슈미트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도 각각 7, 8년 동안 재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후 독일의 총리는 8명에 불과합니다. 독일과 같은 의원내각제를 취하고 있는 일본의 총리는 같은 기간 54명이었던 것에 비추어 보더라도 독일 정치의 중후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연방장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에르하르트 경제장관은 아데나워 총리와 14년을, 겐셔 외교장관은 콜 총리와 16년을 함께하였습니다. 숨 막힐 정도의 끈질김입니다. 현재 람메르트 하원의장도 2005년 10월 이후 계속하여 3연임을 하고 있습니다. 의장을 12년간이나 맡는 것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는 저의 질문에 어떤 독일 교수는, 의장은 국민과 의원들의 존경을 받고 또한 의회 운영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할 것인데 지금 의장이 바로 그런 분이니 너무 당연하다는 대답입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경우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5년 단임의 대통령제로는 장기적·안정적 정책 수행이 불가할 뿐 아니라 막강한 권한에서 시작하여 곧 레임덕으로 연결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전문성을 키워가는 정치인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경험과 경륜의 중요성이 경시되고 오히려 다선이 퇴출 이유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실력 있고 사명감을 가진 정치인들이 제대로 평가받기보다는 오히려 포퓰리즘, 지역감정이나 진영 논리에 의존하고 정파적·이념적 편 가르기에 능한 정치꾼들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국민이고 그 수단은 선거입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자질·실력이 없거나 공부하지 않는 사람, 교활함과 위선으로 국민을 속이는 사람, 목전의 이익을 위해 명분 없이 당적이나 소신을 쉽게 바꾸는 사람, 거친 언행과 편 가르기로 사회를 분열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이를 솎아내는 일에 나서야 합니다. 그리고 경조사 참석이나 무리한 민원의 굴레에서 정치인들을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일부 정치인들이 신봉하거나 활용하는 머레이비언의 법칙, 즉 상대방에 대한 평가나 판단을 함에 있어서 말하는 내용은 7%만 작용하고 나머지는 제스처 등 이미지에 영향을 받는다는 법칙이 깨어 있는 우리 국민에 의하여 깨어지길 소망합니다. 그것이 우리 정치가 경박(輕薄)한 정치로부터 중후(重厚)한 정치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매일경제>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원문보기: http://news.mk.co.kr/column/view.php?year=2016&no=483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