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우 객원논설위원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고문
인권탄압 저지른 김정은… 안보리, ICC 제소 권능 보유
北 급변사태 진압과정서 대량학살-인도적 재앙 생기면 中도 무조건 반대 힘들어
안보리가 ICC 회부 결정하면 어느 나라도 金 망명 허용못해
통일을 경제적 차원의 ‘대박’으로만 보는 것은 편협하고 이기적인 관점이다. 2500만 동족이 극악한 압제와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기회를 찾는 것보다 더 큰 대박은 없다. 인권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일 뿐 아니라 자유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의 존재 이유와도 맞물려 있다.
국회가 10년 넘도록 북한인권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국제적 수치다. 국회가 북한인권법 제정을 팽개친 사이 국제사회의 북한인권담론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2013년 3월 21일 유엔인권이사회 결의에 따라 설립된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작년 2월 17일 제출한 보고서가 담론의 흐름을 바꾼 기폭제다. COI 보고서는 북한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는 반(反)인도 범죄의 실체를 밝히고, 그 정점에 있는 김정은을 비롯한 책임자들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할 것을 건의했다. 이달 18일 유엔총회가 압도적 찬성으로 채택한 북한인권결의도 COI 보고서가 만들어낸 동력의 산물이었다.
COI 보고서가 가져온 가장 의미 있는 변화는 북한 인권 논의의 무대를 지금까지의 유엔인권이사회와 총회에서 안전보장이사회로 확대한 것이다. 인권이사회와 총회 결의가 국제사회의 공론을 확인함으로써 북한 지도부에 정치적 심리적 압력을 가하는 효과는 있으나 북한이 무시하면 강제할 수단이 없다. 그러나 안보리는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에 1차적 책임을 지는 기구다. 안보리에서 채택된 의제는 이 문제가 인권 차원을 넘어 국제안보 차원의 이슈가 됐음을 뜻한다. ICC 설립을 규정한 로마조약에 북한이 가입하지 않더라도 안보리는 북한 지도부를 ICC에 제소할 권능을 보유하고 있다.
현 상황에서 안보리가 북한의 인권탄압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정은을 ICC에 회부할 가능성은 없다. 중국이 거부권을 행사해서라도 반드시 막아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북한에 급변 사태가 발생해 진압 과정에서 대량 학살과 인도적 재앙이 일어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국제사회와 중국 내부의 여론 향배에 따라 중국도 북한정권을 무조건 두둔하고 변호하기 곤란한 상황을 맞을 수 있다. 북한당국이 저지를 참사의 규모와 양상에 따라 안보리가 북한 최고지도부의 반인도 범죄를 국제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유엔 헌장 7장에 따라 ICC 회부를 결정하면 어느 나라도 김정은에게 망명을 허용할 수 없다. 김정은이 북한을 떠나 입국하는 순간 그 나라는 무조건 체포해 신병을 ICC에 넘길 국제법적 의무를 지게 된다.
안보리 논의가 당장은 현실성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가 유사시 선택할 진압 수단과 방법이 자신들의 개별적 운명에 미칠 후과(後果)를 상기시켜 주고 한 번 더 고민하게 만드는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김정은이 물러나는 조건으로 ICC 기소를 유예해주는 형태의 거래(일종의 플리바겐) 가능성도 열어준다. ‘최고존엄’이 ICC 재판에 회부될 가능성이 거론되는 자체가 주민에게 알려지면 수령절대주의적 신정(神政)체제 유지에 부담이 되고 대북(對北) 심리전에도 호재다.
다만 인권침해 내용의 신뢰성과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으면 북한인권 어젠다는 단숨에 모멘텀을 잃을 우려가 있다. ‘14호 수용소로부터의 탈출’ 스토리로 인권문제를 국제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신동혁의 증언이 일부 허위로 밝혀진 사례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북한정권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데 도움이 될 이야기를 발굴하더라도 철저한 교차검증을 통해 신빙성과 객관성이 확인되기 전에 섣불리 공개하는 것은 소탐대실이다.
앞으로 북한 인권담론의 초점은 해외에 파견된 북한 근로자의 노예노동 문제로 옮겨갈 가능성이 높다. 노예노동 여부를 판정하는 핵심 기준은 고용주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직접 지불하는지 여부다. 개성공단도 노예노동 논란에 휩싸일 개연성이 짙다. 정부와 개성공단 진출 기업이 노예노동을 방조했다는 비난을 면하려면 북한 근로자에 대한 임금직불제도를 관철해야 한다.
인권문제가 독자적 가치에 따라 다뤄야 할 사안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그러나 인권문제가 비핵화를 대체할 수도 없고 비핵화에 대한 집중력을 약화시켜서도 안 된다. 북한지도부가 체제 유지를 위해 주민을 괴롭히는 것도 나쁜 일이지만 5000만 남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해칠 흉기를 만드는 데 집착하는 것이 더 못된 짓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51225/755698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