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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核합의로 핵 非확산 체제는 깨졌다천영우 | 2015.08.08 | N0.57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아산정책연구원 고문


이란 핵 합의는 원자로 보유, 농축기술 개발국에 농축 권리 정당성 인정한 것
‘음주는 불법화하면서 술 제조-보유는 허용’… 비확산 체제 치명적 결함 노출
한국의 평화적 원자력 이용… 새 활로 열어준 점은 평가할만


지난달 14일 최종 타결한 이란과 세계 6대 강국 간 핵 합의(정식 명칭 포괄적 공동행동계획)는 이란 핵문제를 넘어 중동의 지정학적 판도와 국제 비(非)확산 체제의 미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문서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외교적 자산을 집중 투자해 이뤄낸 치적으로 내세우며 국민과 의회를 대상으로 눈물겨운 설득을 전개하고 있으나 찬반논란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최대의 이해당사국인 이스라엘이 고마워하기는커녕 대미(對美)관계의 파탄을 각오하고 반대 로비에 열을 올리며 국론분열을 심화시키고 있다. 축제 분위기에 온 국민이 들떠있는 나라는 이란뿐이다.


협상 결과에 대한 평가가 전문가 사이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유는 이번 합의가 이란 핵 문제의 원천적 해결보다는 한시적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 핵심적 성과는 이란의 농축시설 규모를 3분의 1로 감축하고 이미 생산한 저농축우라늄을 대부분 해외로 반출함으로써 핵무기 제조에 걸리는 시간을 현재의 3개월에서 12개월로 늘린 것이다.


문제는 평화적 목적으로는 굳이 자체 농축이 필요 없는 이란에 대해 농축 권리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공인했을 뿐 아니라, 현재 가동 중인 1세대 원심분리기보다 성능이 월등히 좋은 신형 원심분리기 연구개발까지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한 데 있다. 이란으로서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농축 능력만 지킬 수 있으면 장차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농축시설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가동 효율을 높이면서 신형 원심분리기까지 개발하면, 합의가 종료되는 10년 후에는 단 석 달 안에 핵무기를 만들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핵무기 생산 배치를 몇 년간이라도 미루게 됐다는 점에서 양보라고 평가할 부분도 있겠다. 그러나 당장 핵무기 자체를 보유할 계획은 원래 없었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언제든 결심만 하면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면, 이란은 이번 합의로 잃은 게 아무것도 없다.


합의 찬성론자들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성과는 이란이 추가의정서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엄격한 사찰을 수용함으로써 비밀 핵 활동이 불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런데 농축 권리의 정당성을 공인받은 이란으로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핵무기 제조에 가장 중요한 기술을 당당하게 축적할 수 있게 된 마당에 굳이 비밀시설을 가동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아무리 사찰이 철저하다 해도 큰 부담이 없게 됐다. 미국에는 10년이 긴 세월일지 모르나 수천 년간 제국을 경영한 이란으로선 핵개발을 위해 그 정도 기다리는 게 대수가 아니다. 거기에 제재 해제라는 선물까지 챙겨 빈사 상태에 빠진 경제를 회생시키고 후일 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할 체력까지 보강할 수 있게 됐으니 축복이 따로 없다.
 

이번 합의로 핵확산금지조약(NPT)을 근간으로 하는 국제 비확산 체제의 치명적 결함이 드러났다.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핵무기 원료로 사용할 플루토늄이나 농축우라늄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시설을 가동하는 것은 합법이란 것을 확인했다. 술을 마시는 건 불법화하면서 술 제조나 보유를 허용하는 것과 같다.


형식적으로는 합법이라 하더라도 지금까지는 핵공급국그룹(NSG)이 주도하는 수출통제 체제를 통해 핵 확산을 억제했으나, 이란처럼 NPT 체제 밖에 있는 국가(파키스탄)로부터 기술을 도입하거나 독자적으로 농축 기술을 개발한 국가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임을 입증했다. 


궁극적인 핵무장을 추구하는 국가는 북한처럼 불법으로 핵무기를 만들어 국제적 제재와 고립을 자초할 것이 아니다. 평화적 이용 명분을 내세워 NPT 체제 내에서 철저한 사찰을 받으면서 당당하게 농축이나 재처리 시설을 가동하는 ‘준법’ 핵능력 개발이 더 안전하고 현명한 길이다.


이란 핵 합의는 원자로를 보유하고 농축 기술을 독자 개발한 모든 나라에 농축 권리의 정당성을 인정한 것이다. 지금까지 핵무기 보유 여부를 기준으로 핵보유국과 비핵국으로 구분됐으나 이제 농축 재처리 시설 보유를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적실(適實)하다. 경수로 1기를 보유한 이란에 농축이 필요하다면, 20배 이상의 원전설비 용량을 갖춘 한국에 무슨 명분으로 평화적 농축 권리를 제약할 것인가? 이란 핵 합의는 한국의 평화적 원자력 이용에 새 활로를 열어준다는 점에서는 평가받을 만하다.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50807/729185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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