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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과 경제주권, 그리고 화폐주권신제윤 | 2019.03.04 | N0.369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았다. 국권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선조들이 피를 흘렸다. 소중한 국권을 굳건하게 지키는 것이 우리 세대의 기본적인 의무이자 선조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국권을 공식적으로 상실한 때는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이나 `통치권`이 강제 양도된 1910년이다. 하지만 훨씬 그 이전부터 또 다른 국권인 `경제주권`은 지속적으로 침탈당했다. 1876년 2월 병자수호조약으로 조선의 문호는 처음으로 개방되었다. 후속 조치로 그해 8월 `조일무역규칙`과 `조일수호조규 부록`이라는 별도의 통상장정을 체결하였는데 참으로 기막힌 내용이 포함되었다. 일본 상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면제하고 일본 화폐의 조선 내 통용을 허용한 것이었다. 지금 상황에 비유하면 한일 간 통상협상에서 모든 일본산 제품에 영(零)세율을 적용하고 일본 엔화를 우리 원화와 함께 법정 화폐로 인정한다는 협정을 맺은 것이다. `경제주권`의 핵심인 `관세주권`과 `화폐주권`을 포기한 것이다. 

당시 위정자들과 협상 대표들의 `무지`가 큰 몫을 했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영국과 맺은 1842년 난징조약에서 홍콩을 할양하는 등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기본 관세율은 5%로 유지하여 `관세주권`만은 지켰다. 1876년이면 이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때지만 당시 조선의 협상단은 아무런 지식 없이 협상에 임한 것이다. 

빼앗긴 `관세주권`은 몇 년 후 1882년 미국과 `조미통상수호조약`에서 관세 부과를 명문화함으로써 회복되었다. 일본도 무관세만을 주장하기 어려워 마지못해 개정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화폐주권`은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심각한 재정 문제를 해결하고자 품질이 조악한 당오전과 백동화를 남발한 결과 조선과 구한말 화폐는 외면당했다. 이 역시 화폐제도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반면에 일본제일은행은 대규모 차관을 제공하고 은행권까지 발행하면서 사실상 중앙은행 기능을 하게 되었다. 

1900년대 들어 이용익 등이 주도하여 근대적 화폐제도인 금본위제를 도입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하고 일본은 1905년 백동화를 일본제일은행권으로 강제 교환하는 `화폐정리사업`을 시행하였다. 그나마 근근이 명맥을 유지해오던 `화폐주권`은 완전히 사라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국권을 회복하였다. 이제 `통치권`이나 `외교권`을 넘보는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의 `경제주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공동 통화인 유로화를 쓰고 있는 유럽의 작은 나라들이 과연 `화폐주권`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다. 누적된 국제수지 적자에도 자국 화폐가 없어 환율 조정을 할 수 없었던 그리스는 결국 2010년 구제금융을 받고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2006년 일본은 아시아개발은행(ADB)을 통해 아세안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등 13개국을 대상으로 아시아 공동화폐단위(ACU) 계획을 제안했다. 한국 등이 반대해 좌절되었지만 `엔화 위주` 통화 체제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공교롭게도 당시 아시아개발은행 총재와 1876년 병자수호조약 때 일본 대표가 구로다(黑田)로 성이 같다. 

최근 무역협상에서 환율 문제가 통상 문제와 함께 논의되고 있다. 개정된 나프타(NAFTA) 협정에서는 인위적인 환율 절하를 금지하고 이를 해결하는 분쟁 조정 절차까지 명시하였다. 미·중 간 무역협상에서 위안화 환율에 대한 별도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경제주권`에 대한 많은 도전에 시달릴 것이다. 조선 말 국제 정세와 통상에 관한 `무지`로 `경제주권`을 맥없이 놓친 경험이 있다. 세계경제 주도권을 놓고 미국, 중국, 유럽연합, 일본 등 열강들 간 샅바싸움이 한창이다. 국제경제 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신제윤 태평양 고문·전 금융위원장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s://opinion.mk.co.kr/view.php?sc=30500001&year=2019&no=127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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