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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바초프를 회상하며... 한소수교의 숨겨진 이야기관리자 | 2022.09.01 | N0.38
옛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향년 91세의 나이로 30일 세상을 떠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 지속된 냉전체제를 종식시킨 주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집권한 고르바초프는 전제주의적 사회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정책을 추진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동서독 통일을 사실상 용인했고, 그 해 12월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통해 냉전종식을 공식선언했다.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90년 6월 소련 정상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 대통령과 만났고, 그 해 9월 전격적으로 한국과 수교를 맺었다.

한국과 소련이 전격 수교를 맺게 된 이면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1988년 3월 현대건설 회장으로 승진했다. 현대건설 입사 23년, 사장이 된 이래 11년 만이었고 46세 나이였다. 당시 현대그룹은 세대교체의 과정에 있었다. 정주영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후퇴하면서 2세대 경영 체제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다. 정주영 회장과 같은 세대 경영인으로서, 이명박 회장 역시 기업에서의 마지막 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숙고했다. 



현대는 70년대 중반 한국기업 최초로 해외건설공사를 수주했다. 오일쇼크라는 최악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중동진출을 통해 한국경제의 비약적 성장에 기여했다. 그 과정에서 현대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났다. 1세대 경영인으로서 마지막 남은 일은 재도약에 발판을 마련해 놓는 것이었다.

그 무렵 이명박 회장은 세계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곤 했다. 과연 현대가 나아갈 곳은 어디인가? 눈길은 북방으로 향했다. 현대에서의 마지막 작품, 기업인으로서 기업과 국가경제 양쪽 모두에 활력을 줄 프로젝트가 광활한 시베리아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차츰 굳어졌다. 

그러나 길이 없었다. 당시 소련과는 국교는 물론 그 어떤 공식교류창구도 없었다. 모스크바 접근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라크에서 알 무사이 발전소를 함께 건설했던 파트너인 니쇼이와이 상사를 떠올렸다. 일본기업들 가운데 소련과 교류가 가장 활발한 상사였다. 

이명박 회장은 니쇼이와이 상사를 통해 소련진출을 모색했다. 니쇼이와이 상사 역시 현대와 손잡고 소련에 진출하는 것이 이득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했다. 니쇼이와이 상사의 중재가 시작됐고, 1988년 가을 마침내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소련 상공회의소 책임자급 인사가 일본에 가는 길에 한국을 들리겠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이명박 회장을 만나고 소련으로 돌아간 그는 “곧 소련에 초대할 길이 열릴 것 같다. 누가 올지 명단을 알려달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초청장이 올 것이 정해진 뒤 ,이명박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함께 소련에 갈 것을 권유했다. 정주영 회장은 처음엔 관심이 없었다. 이명박 회장은 뉴욕출장 비행기 안에서 16시간 동안 정주영 회장을 설득했다.

“세계에서 자원이 가장 많은 나라가 소련입니다. 우리가 소련에 진출해야할 숙명적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막대한 자원을 육로로 가져올 수 있습니다. 21세기엔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 자원을 해로가 아닌 육로로 가져온다면 우리나라에서 나는 자원과 다를 게 없습니다.”

결국 정주영회장은 납득하고, 방문교섭이 시작됐다. 정부 역시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민감하게 나왔던 안기부에는 “경제적 차원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나서야 승낙을 받았다. 

1989년 1월 10일 모스크바에서 소련 연방 상공회의소 측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현대는 시베리아 개발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한소 경제협력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소련 측도 당황할 파격적 제안이었다. 

소련 측은 한국기업과의 경제협력이 대외적으로 알려지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신중을 기하자는 입장이었다. 북한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한 것이다. 협상은 일단 정지되었으나 이명박 회장은 소련상공회의소 수석 부회장 골라노프와 보드카를 마시며 대화를 계속했다. 한국기업이 동남아와 중동에 진출해 성공한 사례를 들며 소련경제개발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을 자극할 생각 전혀 없다. 지금 나눈 대화 내용을 정부 최고위층에 전달해 진심을 알려달라”고 설득했다. 

결국 협상은 속개됐고 1989년 1월 11일 경제협력공식창구를 만드는 문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후 1차 방문의 물꼬를 시작으로 무려 일곱 차례에 이르는 공식방문이 이어졌다. 89년부터 91년까지 초인적인 행군으로 시베리아벌판을 다니면서 레닌그라드의 알루미늄 제련소 건설, 연해주 임산업 합자회사 설립, 석유화학제품 합작회사 설립, 올가 항의 펄프제지공장 건설, 옐킨스꼬어 석탄개발 및 철도건설, 아큐트 가스개발 등 굵직한 합의가 이뤄졌다. 

고르바초프는 현대의 활동을 보면서 한국기업들과의 협력을 통해 소련 경제에 활력을 불어 넣을 것을 기대했다. 결국 고르바초프의 이런 생각은 한소 양국 장래에 대한 새로운 관계 설정을 모색하게 하는데 이르렀고, 90년 9월 한소정부간 수교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1990년 11월 5일,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이명박 회장이 모스크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을 만났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철의 장막'을 열어젖히며 핵무기의 감축과 규제를 주장했고 자국에는 언론의 자유와 서방식 민주주의 사고방식을 도입하려 애썼다. 그러나 91년의 생을 마무리 하며 자신의 모든 성과가 전쟁터의 한 줌 재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방언론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임자의 모든 성과를 짓밟고 철의 장막을 다시 쳤다고 지적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드리운 전쟁의 암운은 고르바초프의 죽음과 함께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이 다시금 주목받는 대조 효과를 내며 세계인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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