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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인을 뛰게 하라권태신 | 2017.03.27 | N0.222

1984년 워싱턴DC. 필자는 정부의 비료산업 합리화 정책과 관련해 미국 국제개발처(AID)와 협의하기 위해 미 국무성 7층으로 향했다. 국내 비료산업이 과잉생산으로 경쟁력이 떨어짐에 따라 생산량 감축을 위해 몇 개 업체를 폐쇄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차관 협정을 맺은 AID의 협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측은 비료산업 합리화에는 별 관심이 없고, 노골적으로 한 가지만을 요구했다. 바로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세계적인 비료회사 아그리코(Agrico)의 독점적 수출계약을 유지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오래전부터 서구 선진국의 가장 큰 과제는 `어떻게 하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자국의 일자리를 만들 것인가`에 놓여 있었다. 미국은 연방정부 차원을 넘어 각 주(州)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1994년 필자가 재무부에서 해외투자과장을 담당할 때는 우리나라보다 작은 스위스에서, 그것도 제네바시와 취리히시가 각각 방문해 투자를 요청한 기억도 있다.


최근에도 그러한 상황은 변함이 없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세계 여러 기업인을 만나 일자리를 챙겼고, 미국 우선주의에 기반해 보호무역조치 등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는 플로리다주에 있는 트럼프의 별장까지 날아가 27홀이나 같이 골프를 치며 미·일 관계 개선에 주력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은 자국 기업 보호는 물론 사드 배치를 이유로 우리나라에 경제보복까지 하고 있는 판국이다. 세계 각국의 `스트롱맨`들이 나서서 자국 기업과 일자리를 챙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반기업 정서가 만연해 기업인 사기는 떨어지고, 기업을 잘되게 하기는커녕 기업하기 어려운 환경만 늘어나고 있다. 또한 피터팬 증후군이 만연해 중소기업은 중견기업으로, 중견기업은 대기업으로 성장하려 하지 않는다. 기업이 성장하게 되면 그동안 받던 혜택은 사라지고 각종 규제에 제한을 받으며, 심지어는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기업인들의 글로벌 활동을 장려하지는 못할망정 출국금지 조치 때문에 기업인들은 기회가 와도 살릴 수가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두 번이나 트럼프를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무산됐다. 최태원 SK 회장은 다보스포럼에 이어 중국 보아오포럼 참석까지 좌절됐다. 중국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받고 있는 신동빈 롯데 회장은 8개월가량 국내에 발이 묶여 있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고위급이 직접 대면했을 때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는 점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상황이다.


기업인은 기업을 위해서 일하지만, 민간 외교 채널로서도 큰 역할을 담당한다. 민간 경제계는 공식 채널과는 달리 비즈니스에 기반한 네트워크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악화된 한일 관계 속에도 경제계는 2014년 한일재계회의를 개최하며 7년 만에 민간 대화의 물꼬를 텄다. 작년 말에는 미수교국인 쿠바와 1959년 수교 단절 이후 처음으로 민간 경제협력위원회를 개최했다. 뿐만 아니라 88서울올림픽, 여수엑스포, 평창동계올림픽을 비롯한 국가행사 유치에도 고 정주영 회장, 이건희 회장 등 경제계의 공이 컸다. 최근 국가적 리더십 공백으로 정부가 제 역할을 하기 쉽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할 때 이들의 역할을 충분히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특검은 마지막 언론브리핑에서 출국금지와 관련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업인의 출국금지가 풀렸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촌각을 다투는 경쟁 속에서 기업인이 느끼는 출국금지의 무게는 남다를 것이다. 대내외 여건이 어렵고 리스크 요인이 산적한 지금 기업인 민간 외교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미국·영국 등에도 출국금지 제도가 있지만 흉악범에게나 적용될 뿐 국내에서와 같은 기업인 적용은 흔치 않다. 더구나 글로벌 기업의 대표가 외국으로 도주할 가능성도 사실상 희박하다. 누구보다 힘차게 글로벌 현장을 누비는 민간 외교관, 기업인의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나만의 욕심일까.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매일경제>에 기고한 글입니다.
원문보기: http://opinion.mk.co.kr/view.php?year=2017&no=204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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