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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넘어 산, 경호처와 서울시문화재위원회이명박 | 2018.02.28 | N0.161
산 넘어 산, 경호처와 서울시문화재위원회

기무사 부지는 국방부 소유인 데다 대통령에게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치료를 담당하는 국군서울병원이 있는 곳이었다. 이 같은 문제로 인해 전임 정부 때도 선뜻 추진하지 못했던 난제였다. 문화체육관광부를 중심으로 교육과학기술부, 국방부, 기획재정부, 청와대 경호처 등이 본격적인 협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부지 선정, 기존 시설의 이전과 이에 수반되는 막대한 예산 등으로 정부 내에서조차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특히 가장 크게 반대한 부처는 청와대 경호처였다. 당시 김인종 경호처장이 가장 완강하게 반대했는데, 경호처의 이 같은 반대는 역사가 깊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철거하려 했으나 결국 경호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군사 쿠데타가 나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는 일을 겪은 경호처의 입장에서는 대통령과 청와대를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를 국군서울병원이라고 생각했다. 대통령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이 병원이 없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무슨 일이 생기면 서울대학병원으로 가도 괜찮아요.” “서울대 병원도 청와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서는 국군서울병원이 꼭 필요합니다.” 경호처는 내가 이야기를 해도 절대 불가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돌파구가 생겼다. 청와대 옆에 있는 교원소청심사위원회가 교통이 불편하여 교사들이 찾아오기 어렵다는 민원이 오랫동안 제기되고 있었다. 

교원소청심사위원회를 좀 더 교통이 편리한 곳으로 옮기고 국군서울병원을 교원소청심사위원회가 있는 자리로 옮기는 대안이 제시됐다. 청와대 경호처가 이마저 반대하지는 않았다. 2008년 9월, 차관급 부처 조정회의를 통해 각 부처의 합의가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기무사 터를 미술관 부지로 100퍼센트 활용하고, 국군서울병원을 교원소청심사위원회 부지로 이전하는 데 각 부처가 동의했다. 아울러 미술관 건립을 위한 예산도 당정 협의를 통해 예산안에 추가 반영하기로 했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었다. 공사를 시작하기에 앞서 서울시문화재위원회가 문화재 발굴 조사를 했다. 이 터에는 원래 조선왕조 종친부 건물이 있었다. 종친부는 조선시대에 국왕들의 족보와 어진을 봉안하고 왕실 친척들 관련 업무를 하던 관청으로 문화적 가치가 높았다. 그러나 1981년 전두환 정부는 종친부 건물을 해체하여 정독도서관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기무사 테니스장을 만들었다.

문화재는 모두 옮기고 빈 터만 남은 상황이라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도 미술관 건립을 이미 승인했다. 그러나 서울시문화재위원회는 종친부 건물 집터 보존 때문에 허가할 수 없다며 미술관 설계안을 부결시켰다. 문화재청이 승인한 사항을 서울시가 문제 삼는 이상한 경우였다.

당시는 박범훈 중앙대 총장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임명된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박 수석은 대학 총장 출신으로 대통령실장으로 와야 할 정도의 무게를 가진 인물이었다. 더욱이 교육뿐 아니라 문화 분야에서도 큰 역할을 할 수 있어 교육문화수석으로 초빙한 것이다. 박 수석은 오세훈 서울시장을 만나봤지만, 오 시장도 서울시문화재위원들이 반대하면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미술관 건립을 발표한 지 벌써 3년이 다 돼가고 있었다. 하루는 답답한 마음에 출근길에 교육문화수석실을 예고 없이 들렀다. 아침 7시 정도 되었는데 비서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대학교수회의 같은 분위기였다. 박범훈 수석은 얼마 전까지 중앙대 총장으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또한 정일환 교육비서관은 대구 가톨릭대 교수였고, 안경모 관광비서관은 경희대 교수였다.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와 비서관들을 보며 이야기했다.

“총장과 교수들이 다 모였네……. 교수회의 하나?” 그러자 박 수석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총장하면서 교수들한테 질려서 피해 나왔는데, 여기서 또 교수들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비서관들도 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 “총장 보기 싫어 대학에서 나왔는데, 여기서 또 총장을 만났습니다.” 교육문화수석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보기 좋았다. 

나는 박 수석에게 서울시문화재위원들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박 수석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부분 대학교수들이라고 했다. 나는 박 수석에게 이야기했다. “그럼 잘 됐네. 총장 수석이 직접 나서서 교수 위원들을 설득하면 되겠네. 박 수석이 위원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봐요.”

얼마 후 박 수석이 보고서 하나를 들고 왔다. 그동안 서울시장을 비롯하여 서울시문화재위원들을 만나 설득 작업을 벌였다고 했다. 그 결과 종친부 건물을 원래대로 복원하고, 본관 건물을 그대로 살리며, 지하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 약간의 설계 변경을 하기로 하고 설득을 했다는 것이다.

2011년 6월 28일, 오랜 숙원이었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드디어 착공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번 꼬이기 시작한 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12년 8월 13일, 공사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인명 피해까지 발생한 대형 사고였다. 그로 인해 무리한 공사가 화재의 원인이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결국 완공일이 늦춰져 2013년 11월 12일, 종로구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개장을 했다. 많은 홍역을 치른 끝의 완공이라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미술관 건립은 역대 정부들도 하지 못한 미술계의 오랜 숙원이었으며, 내 개인적으로도 국회의원 시절부터 꿈꾸던 일이었다. 미술관 건립으로 시민들은 보다 가까이에서 손쉽게 수준 높은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세계는 우리를 본받겠다는데

2008년 4월 20일, 파라과이 대통령 선거에서 좌파정당과 사회단체연합인 ‘변화를 위한 애국동맹(APC)’의 페르난도 루고 후보가 승리를 거뒀다. 보수정당인 콜로라도당은 집권 61년 만에 처음으로 야당에게 정권을 내줬다. 당시 국내 일부 언론들은 루고의 승리를 놓고 “남미 좌파 벨트가 확산됐다”는 기사를 앞다투어 내놨다. 남미 좌파 벨트란 1990년 이후 남미 열두 개 나라 중 여섯 개 나라에 좌파 성향의 정권이 들어선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루고의 승리로 남미의 좌파 벨트는 7개국으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사 이면에는 보수정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었다. 남미의 좌파 벨트 확산은 보수정책의 실패로부터 기인하며, 따라서 우리 역시 국정 운영의 방향을 좌측으로 틀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2008년 6월 2일, 루고가 파라과이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루고는 나와 접견한 자리에서 당선 후 서둘러 한국을 방문한 이유를 밝혔다.

“한국의 발전 모델을 벤치마킹하여 파라과이 신정부의 경제정책을 수립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나는 루고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언론들의 보도가 생각나 쓴웃음을 지었다. 한국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파라과이뿐만이 아니었다. 남미의 또 다른 좌파 국가인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도 2010년 8월 26일 한국을 방문하여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한국의 성공을 볼리비아 국가발전에 벤치마킹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2010년 9월 8일 방한한 에콰도르의 라파엘 꼬레아 대통령도 한국의 발전 경험을 전수받아 에콰도르 발전의 모델로 삼겠다고 했다. 칠레의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도 2012년 6월 내가 칠레를 공식방문했을 때, 짧은 기간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이 칠레 국가발전의 롤모델이라고 평가했다.

피녜라 대통령의 전임인 미첼 바첼렛 칠레 대통령은 앞서 2009년 11월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당시 이례적으로 어머니와 함께 방문했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바첼렛과 나는 남극을 함께 가자고 약속했지만 아직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함께 남극을 방문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도 좌파 출신이었지만 취임 후 방만한 사회보장제도를 개혁하고, 시장주의정책을 추진했다. 룰라는 나를 처음만났을 때 “이 대통령도 노조위원장 출신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에대해 잘못 알고 한 말이다. 그는 “나도 상파울루에서 자동차노조위원장을 했으니 우린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일당 노동자 출신이긴 하지만 노조위원장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룰라는 그게 그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좌파 출신 대통령으로 시장주의정책을 추진했던 룰라는 젊은 시절 일당 노동자를 했던 나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중남미 국가들 이외에도 아프리카, 아시아를 비롯해 재임 기간 중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개도국 정상들은 한국의 발전 경험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유독 국내에서만은 우리 현대사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현대사가 부끄럽고 청산해야 할 역사라는 인식이 힘을 얻고 있었고,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우리 현대사의 부정적인 측면이 유난히 강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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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충웅 2018-02-28 06: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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