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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보다 먼저 EU와 FTA 타결이명박 | 2017.08.28 | N0.105
미국보다 먼저 EU와 FTA 타결

“EU와 FTA 협상은 일본이 먼저 시작했는데, 왜 한국을 아시아 첫번째 FTA 파트너로 선정했습니까?”

2010년 10월 6일 벨기에 브뤼셀 EU 이사회 본부에서 열린 한·EU 정상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본 기자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이날 나는 헤르만 반 롬푀이(Herman Van Rompuy) EU 정상회의상임의장, 조제 마누엘 두랑 바호주( José Manuel Durão Barroso) EU 집행위원장과 한·EU FTA 협정문에 공식 서명했다.

EU는 유럽 27개국으로 형성된 세계 최대 경제권이었다. 한국의 두 번째로 큰 교역 상대이자 한국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는 투자 주체이기도 했다. 이날 EU는 먼저 FTA 협상을 시작한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한국과 FTA를 체결한 것이다.

그동안 EU는 20여 개국과 여러 형태의 무역 협정을 맺어왔다. 그러나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는 포괄적 협정은 한·EU FTA가 처음이라는 점에서 이날의 협상은 의미가 컸다. 카렐 드 휴흐트(Karel De Gucht) EU 통상 담당 집행위원은 한·EU FTA를 EU가 맺은 ‘최초의 신개념 FTA’라 평했다.

“한국은 우리가 제안한 여러 가지 조건에 부응한 국가입니다. 한국과의 FTA는 EU 집행위원회가 혼자 한 것이 아닙니다. 27개 국가의 요구 조건을 만족시키는 데는 여러 가지 어려운 점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EU 국가들과 조율하는 작업을 한국을 상대로 진지하게 이루어냈습니다.”

바호주가 일본 기자의 질문에 답변했다.

EU와의 FTA 협상은 노무현 정부 말기인 2007년 5월 개시됐다. 이후 2009년 3월까지 총 여덟 차례 공식 협상과 두 차례 확대수석대표회의 끝에 타결됐다. 이후 법률 검토를 거쳐 이날 공식 서명한 것이다.

바호주의 말처럼 한·EU FTA 협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EU 27개 국가 중 한 나라만 반대해도 협상은 타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는 한·미 FTA 협상도 진행 중이었다. EU는 한국이 미국에 앞서 EU와 FTA를 체결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일대일 협상으로 끝나는 한·미 FTA보다 27개 국가와 일일이 개별 협상을 해야 하는 한·EU FTA가 훨씬 더 어려웠다.

협상 과정은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영국과는 대형마트 문제가 불거졌고, 독일은 자동차, 프랑스는 화장품 문제로 각각 협상에 난항을 겪었다. 벨기에는 돼지고기를 비롯한 식품류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과 이혜민 협상단장을 주축으로 한 우리 협상 실무 팀은 매우 효율적인 협상 방식으로 난관을 하나하나 극복해나갔다. 그들이 없었다면 한·EU FTA는 결코 체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한·EU FTA를 둘러싸고 우리 부처 간에도 갈등이 빚어졌다. 국내화장품산업의 발전을 모색하던 전재희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EU FTA 대상 품목에서 화장품을 제외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의 입장에서는 화장품업계에 속한 2만여 개에 달하는 회사들이 한·EU FTA로 인해 타격을 받을까 봐 우려됐기 때문이다.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연구개발(R&D) 예산에 그동안 빠져 있던 화장품산업을 집어넣는 대안으로 전 장관을 설득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한·EU FTA가 체결되면 우리 화장품회사들은 대부분 문을 닫게 될 것이라 우려했다.

그러나 화장품업계에 대한 우려 역시 한·칠레 FTA 체결 당시 포도 농가에 대한 우려처럼 기우에 불과했다. 한·EU FTA가 발효된 지 3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화장품회사는 프랑스 파리에 지점을 낼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내가 만난 외국 정상의 부인들 중에는 한국 화장품을 즐겨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각 부처와 협상 팀의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2010년 중반까지 EU 대부분의 국가들과는 협상이 타결됐다. 마지막 관문은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는 한·EU FTA로 자국의 자동차산업이 타격받을 것을 우려해 끝까지 반대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볼가 강변의 저녁 술자리

2010년 9월 10일,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주관하는 야로슬라블 세계정책포럼 참석차 러시아를 방문했다. 같은 날 EU는 27개 회원국 관계장관들이 모인 가운데 특별이사회를 열어 한·EU FTA 승인 여부를 논의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협정에 반대하면서 승인이 연기됐다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EU는 당초 자신들이 이탈리아를 설득하겠다며 한국은 나서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이탈리아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EU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내게 이탈리아를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탈리아의 반대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자동차회사인 피아트는 소형차를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반면 우리가 EU에 수출할 자동차는 중·대형차였다. 우리 소형차는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현지 공장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한·EU FTA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한·EU FTA로 이탈리아 자동차산업이 받을 타격은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추정됐다.

마침 세계정책포럼 참석차 베를루스코니도 러시아에 와 있었다. 이탈리아 실무진은 나와 베를루스코니의 양자 정상회담을 반대했다. 베를루스코니가 갑자기 한·EU FTA에 대한 입장을 바꿀까 봐 우려하는 것 같았다. 마침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을 포함해 셋이 함께 만찬을 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세 사람은 아름다운 볼가 강의 풍경을 감상하며 음악에 와인과 보드카를 곁들인 식사를 했다. 메드베데프와 베를루스코니는 본래 가까운 사이였다. 메드베데프는 자신이 주최하는 포럼에 참석해 내가 기조연설을 해준 것에 대해 매우 고마워했다. 우리는 보드카를 함께 마셨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만찬을 즐기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베를루스코니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이 어느 정도 열렸다고 생각됐다. 나는 베를루스코니에게 다가가 말했다.

“오늘 EU 장관회의에서 한·EU FTA에 사인을 못 했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미팅을 한다는데 이탈리아가 협조해주셨으면 합니다.”

음악소리가 매우 커 베를루스코니의 귀에다 대고 쉬운 말로 “EU·Korea FTA, OK?”하면서 여러 번 강조했다.

“나도 알아요. 오케이, 오케이.”

의외로 베를루스코니는 흔쾌하게 대답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다.

“I believe you(나는 총리를 믿습니다).”

일주일 뒤인 2010년 9월 17일 이탈리아가 발효 시기를 다소 연기하는 것을 전제로 반대 입장을 철회하면서 한·EU FTA는 EU 특별이사회에서 승인됐다. 한·EU FTA가 마지막 관문을 넘은 것이다.

이듬해 2011년 2월 유럽 의회를 통과하면서 한·EU FTA는 EU 측에서 먼저 비준됐다. 우리 야당이나 진보단체들도 한·미 FTA와 달리 한·EU FTA는 악착같이 반대하지 않았다. 2011년 5월 우리 국회도 비준에 동의하면서, 2011년 7월 1일 한·EU FTA가 잠정 발효됐다.

나는 이탈리아가 한·EU FTA에 대한 입장을 바꾸는 데 베를루스코니가 자국 정부 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볼가 강변의 만찬에서 베를루스코니가 내게 한 약속이 마지막 빗장을 푸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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