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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례화한 한·일·중 정상회의이명박 | 2017.06.19 | N0.94
19 정례화한 한·일·중 정상회의

3국 정상회의를 제안하다

“지금까지 일본은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해왔습니다. 나는 미·일 동맹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시아를 보다 중요시하는 정책을 만들어나가겠습니다.”

2009년 10월 10일 중국 베이징에서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렸다. 취임 후 이 자리에 처음 참석한 하토야마 일본 총리는 자신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원 아시아)’을 이야기했다. 이날 발언은 듣기에 따라 미국과 거리를 두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평소 미국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고려할 때 다소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하토야마의 원 아시아 구상은 한·중·일 3국 중심의 아시아 공동체 형성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중·일 3국이 과거사 문제를 비롯해 복잡하게 얽힌 현안들을 단번에 풀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취임 초부터 한·중·일 3국 공동체와 관련하여 구상을 갖고 있었다. 과거에는 세계경제가 NAFTA와 EU라는 두 개의 경제블록에 의해 좌우됐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로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역할이 커졌다.

특히 한·중·일 3국은 전 세계 GDP의 20퍼센트(2011년 기준 14조 77억 달러), 전 세계 교역량의 17.6퍼센트(2011년 기준 5조 8,000억 달러)를 차지할 정도로 그 비중이 커졌다. 그럼에도 한·중·일 3국은 뚜렷한 결속을 이루지 못하여 EU나 NAFTA처럼 하나의 경제권을 형성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한·중·일 3국이 협력하여 EU나 NAFTA에 견줄 만한 경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방법론에 있어 보다 현실적이고도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 그답이 있다고 보았다.

내가 2008년 중·일 양국에 3국 정상회의를 제안한 것은 그런 뜻이었다. 원래 3국 정상회의는 1999년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3국정상이 조찬 미팅을 가지면서 시작됐다. 이후 아세안+3 정상회의가 열릴 때마다 3국 정상회의가 열렸다. 나는 아세안+3 정상회의와는 별도로 한·중·일 3국 회의를 정기적으로 갖자고 제안했다. 별도의 정례회의를 통해 당면한 현안부터 하나씩 논의해나가자는 의미였다.

또한 3국 협력사무국을 서울에 두고 상호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자고 제안했다. 내 제안이 받아들여져 3국 정상회의는 2008년부터 일본, 중국, 한국 순으로 순차적으로 5차례 개최됐다. 2011년 9월에는 서울에 3국 협력사무국을 유치했다. 사무국을 우리가 유치하는 대신 회의 개최 순서를 양보했다.


갈등 있어도 계속해야

내 임기 말까지 한·일·중 정상회의는 18개의 장관급 회의, 100개 이상의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할 정도로 많은 성과를 냈다. 3국 회의가 결코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중·일 간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한때 3국 회의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10년 9월 센카쿠(조어도) 인근 해역에서 일본 순시선이 조업 중인 중국 어선을 나포하고 중국 선장을 체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 정부는 거세게 항의했고 희토류 수출 금지 등 일본에 보복 조치를 취했다. 이 일로 중·일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한·일·중 정상회의가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010년 10월 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제8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가 열렸다. 나는 이날 한·일, 한·중 정상회담을 순차적으로 가지면서 그달 29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아세안+3 정상회의 때 한·일·중 정상회의를 열자고 제안했다.

내 제안이 받아들여져 하노이에서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는 통상의 정상회의와는 달리 미리 의제를 정하지 않은 채 자유토론 형식으로 진행했다. 나는 이 회의를 주재하며 원자바오 총리와 간 나오토 총리를 화해시키고자 노력했다.
세 나라 정상은 회의가 시작되기 전 기념사진을 찍었다. 원자바오와 간은 어색한 모습으로 서로 떨어져 서 있었다. 나는 가운데 서서 두 사람의 손을 잡아끌어 서로 맞잡도록 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날 회의에서 중·일 양국은 골칫거리였던 희토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세 나라 간의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 한·일·중 정상회의도 지속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회의가 끝날 무렵 원자바오가 말했다.

“한국이 3국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이번 회의를 추진한 것에 감사드립니다. 중국은 앞으로 계속 한·일 양국과 노력하여 3국 협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간 총리가 말했다.

“내년에는 3국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일본이 회의 준비에 매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말했다.

“동북아시아에 여러 현안이 있습니다만,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앞으로 3국 대화를 통해 여러 문제를 극복하면서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일 정상 간의 갈등으로 내가 곤란한 입장에 처한 일도 있었다. 2012년 5월 13일부터 14일까지 양일간 중국 베이징에서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렸다. 한·일·중 정상회의의 중국 측 참석자는 항상 원자바오였다. 13일 원자바오가 주재하는 정상회의를 마친 후 다음 날 후진타오 주석과 한·일 양국 정상이 만나는 회담 시간이 마련됐다.

후진타오는 한·일 양국 정상과 별도로 개별 정상회담을 갖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후진타오가 내게 회의가 끝나면 바로 나가지 말고 시간을 끌어달라고 했다. 일본 몰래 따로 한·중 개별 정상회담을 갖자는 의미였다.

이날 나는 회의장에서 시간을 끌다 노다 일본 총리가 퇴장한 뒤 후진타오와 정상회담을 했다. 그러나 노다는 회의장을 나간 뒤 바로 숙소로 가지 않고 인민대회장 현관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노다는 후진타오와 내가 회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후쿠시마 원전 피해 직후인 2011년 5월 도쿄에서 열린 한·일·중 정상회의 때도 악화된 중·일 관계로 중국이 불참 의사를 밝힌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먼저 참석 의사를 밝히고 중국을 설득해 회의는 정상적으로 열렸다.

한·중·일 3국은 서로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안보와 경제문제 등에서 가까워질 수도, 심각한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쟁이 있다 해도 3국 정상은 정례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논의를 계속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일·중 정상회의를 처음 개최할 때 3국이 약속한 일이며, 세계 평화에도 기여하는 일이다. 또한 우리의 국익을 위해서도 정상회의를 통해 중·일 양국 관계를 조율하는 가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어떤 경우라도 한·일·중 정상회의가 정례적으로 열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2013년 한국에서의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리지 못한 데 대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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